[경제] 빚 여러 곳에 있어도, 기준 맞으면 모두 감면…빚 탕감 기준 논란

본문

정부가 7년 이상 갚지 못한 5000만원 이하의 개인 채무를 일괄 탕감하기로 하면서, 형평성 논란이 커지고 있다. 빚 감면 한도가 1인당이 아니라 대출 1개 기준으로 설정돼, 다중 채무자는 5000만원이 넘는 빚을 감면받을 수 있어서다.

5000만원 이하면, 빚 여러 개라도 모두 탕감

23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출자한 채무조정 기구는 빠르면 올해 3분기에 7년 이상 연체한 5000만원 이하의 개인 채무(담보 빚은 제외)를 금융사로부터 일괄 매입한다. 이때 사들이는 채무의 기준은 돈을 빌린 사람 1명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출 1건당 적용한다. 빚을 여러 곳에 지고 있어도, 기준에 맞으면 모두 감면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17506705909365.jpg

교대역에 채무 관련 법무법인 광고물이 붙어있다. 연합뉴스

예를 들어 A씨가 10년 연체한 5000만원 짜리 은행 대출 1건과 8년 연체한 2000만원 짜리 저축은행 대출 1건이 있다면, 두 대출 모두 7년 이상 연체한 5000만원 이하 대출 기준에 해당하기 때문에 매입 대상이다. A씨가 상환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최대 7000만원까지 탕감받을 수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개인 채무는 4000개 넘은 금융사에 나뉘어 있는데, 탕감 기준을 1인당으로 정하면 이들 금융사의 채무 정보를 전산으로 통합해 선별해야 한다”면서 “이는 비용이나 시간 측면에서 불가능하다”고 했다.

사행 산업 하다가 빚져도 감면 가능

업종 제한이 없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윤석열 정부에서 만든 자영업자 채무조정 프로그램인 새출발기금은 부동산 임대업이나 법무·회계·세무 업종 등 같은 전문직, 도박·사행성 오락기구 제조업 등은 지원 대상에서 뺐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가 발표한 장기 연체채권 채무조정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는 개인사업자 빚은 업종 제한이 없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개인의 삶을 구제하는 게 목표이다 보니 어떤 직종에 종사했는지, 사업 내용은 무엇인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도박·사행성 사업을 하다가 빚을 져도 조건만 맞으면 여러 개의 채무를 모두 탕감을 받을 수 있다.

금융당국 “파산 능력 심사해 도덕적 해이 방지”

금융당국에서는 형평성 논란이 있더라도, 다중 채무자나 업종의 구분을 두지 않고 구제해 주는 것이 정책의 효과성 측면에서는 낫다고 본다. 7년 이상 연체한 채무는 사실상 받을 수 없는 빚이다. 이 때문에 기준을 따지기보단 일단 채무를 정리해 재기를 돕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어서다. 또 다중 채무자는 취약 계층일 가능성이 높아, 가급적 많은 빚을 정리해 신용도 회복을 돕는 게 더 필요할 수 있다. 지난해 한국은행이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말 다중채무자이면서 저소득(하위 30%)이거나 저신용(신용점수 664점 이하)인 취약차주 수는 전체 차주의 6.6%를 차지했다. 이는 지난해 1분기(6.4%)에 비해 소폭 오르는 추세다.

1750670591168.jpg

기획재정부 임기근 2차관이 지난 18일 정부세종청사 민원동 공용 브리핑실에서 새 정부 추가경정예산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환 능력을 심사해 탕감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걸러낼 장치는 마련돼 있다는 게 금융당국 판단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1000만원 이하의 빚을 10년 이상 연체한 159만명의 원리금을 전액 감면하는 방안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상환 능력 등을 판단해 본 결과, 실제 정부에서 탕감을 결정한 인원은 11만8000명(6000억원)에 불과했다. 이번에도 심사 등을 거치면 혜택받은 인원은 더 줄어들 수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7년 이상 연체한 5000만원 빚 중에서 파산 수준으로 정상적 상환이 불가능한 경우만 탕감해 주기 때문에 형평성이나 도덕적 해이를 어느 정도 판별할 장치가 있다”면서 “일단 기준에 맞는 개인 채무를 3분기 중으로 최대한 매입한 후, 불합리한 부분을 기술적으로 걸러낼 수 있다면 추가 기준을 마련해 볼 것”이라고 했다.

정권마다 ‘빚 탕감’, 성실 상환자에 ‘잘못된 신호’

그럼에도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새 정부마다 장기 연체자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하면서, 결국 갚지 않고 버티면 된다는 인식이 확산할 수 있어서다. 빚 탕감 재원의 절반인 4000억원을 금융사에 조달하겠다는 방침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상법 개정안을 통해 주주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이재명 정부가 정작 은행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서다.

금융권 관계자는 “새 정부 출범부터 벌써 민간 금융사에 지원을 요청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서민 지원 이슈가 나올 때마다 금융사가 돈을 내야 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결국 대출을 소액으로 쪼개서 버티면 된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장기 연체 채무라도 해도 도덕적 해이를 부를 수밖에 없다”면서 “가급적 1인당 탕감 금액의 형평성을 맞추고, 문제가 되는 업종은 제한하는 등 추가 정책 보완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3,663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