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대판 무당·꽃미남 저승사자와 K팝 세계관의 만남…31개국 1위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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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인공 걸그룹 헌트릭스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보이그룹 사자보이즈. 인간의 혼을 노리는 저승사자다. 사진 넷플릭스

꽃미남 5인조 사자보이즈가 갓을 쓰고 검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무대에서 춤을 춘다. “I'm all you need, I'll be your idol.” (난 너의 전부야. 난 너의 아이돌이 될 거야)
갓 끈을 살짝 잡고 눈웃음까지 지어 보이자, 관객석은 터질 듯한 함성으로 뒤덮인다. 이들의 퍼포먼스에 작품을 지켜보던 시청자들까지 빠져들었다. 31개국 1위, 93개국 톱10(24일 플릭스패트롤 기준)에 랭크한 넷플릭스의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야기다.

20일 공개된 이 작품은 한국의 아이돌을 소재로 하는 최초의 해외 제작 애니메이션이다. 춤과 노래로 세계 평화를 지키는 ‘퇴마사 걸그룹’ 헌트릭스와 이에 맞서는 ‘악령 보이그룹’ 사자보이즈가 대립하는 내용이다. 헌트릭스는 현대판 무당과 같은 존재고, 사자보이즈는 저승사자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K팝이나 한국적 요소들은 글로벌 Z세대 취향에 어필하는 메인 컬쳐가 됐다. 트렌디하고 쿨한 이미지가 해외 젊은 층 사이 자리잡은 것”이라고 작품 인기 요인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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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에 맞서는 퇴마사 걸그룹 헌트릭스. 사진 넷플릭스

주요 스토리만 보면 유치할 수 있지만, 다루는 주제는 심오하다. 퇴마사 헌트릭스의 리더 루미는 인간과 악령 혼혈로 자아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이를 눈치 챈 사연 있는 악령 사자보이즈 리더 진우는 루미와 교감하고 서로 연민하며 공감해준다. 결국 루미는 헌트릭스 멤버들과의 우정과 신뢰를 되찾고 성장한다.

외신들은 스토리 전개를 호평했다. 뉴욕타임스는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면서도 전통을 잇는 감각적인 세계관”이라고 했고, 미디어 웹진 IGN은 “진지함과 유쾌함의 균형을 완벽히 잡았다”고 리뷰했다. 비평사이트 로튼토마토의 평론가 점수는 95%, 관객 점수는 별 5개 중 4개 반으로 높은 점수를 기록 중이다.

한국의 K팝 문화를 잘 담아냈다는 평가도 있다. 출생의 비밀을 숨긴 루미로 인해 팀 전체의 운명이 위태로워진다는 설정, 선후배 관계를 지키면서 90도 인사를 주고 받는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스, 투어를 끝내고 ‘공백기 3개월’이 주어져 기뻐하는 헌트릭스 모습 등에서 특유의 한국 아이돌 분위기가 느껴져 웃음을 자아낸다.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스를 묶어 연애 서사로 팬픽을 만들거나, 틱톡 챌린지에 동참하고 시상식에서 응원봉을 들고 소리지르는 팬들의 모습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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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사자보이즈는 케이팝 보이그룹의 청량공식에 맞춰 상큼한 의상을 입고 중독성 강한 '소다팝'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사진 넷플릭스

포브스는 매기 강 감독의 인터뷰를 인용해 “K팝 팬문화와 아이돌 산업의 ‘아키타입’(무의식 속에서 보이는 보편적 이미지)을 담아냈다”며 작품의 문화적 함의를 짚었다. 9년 넘게 이 프로젝트에 몰두했다는 강 감독은 “초기부터 한국 악귀 신화와 설화를 탐구하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K팝 요소를 발전시킨 것”이라며 “실제 K팝 팬인 스태프도 참여했고 일부 스태프들은 이 영화를 만들다가 K팝 팬이 됐다”고 했다. “캐릭터 구상을 위해 방탄소년단·스트레이키즈·빅뱅·몬스타엑스·트와이스·블랙핑크·있지 등을 연구했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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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건물과 산이 어우러진 서울 모습. 남산타워는 저작권 허가를 거쳐 영상에 사용됐다. 사진 넷플릭스

여기에 빅뱅·투애니원·블랙핑크 등의 히트곡을 만든 테디를 비롯한 더블랙레이블 소속 프로듀서, 블랙핑크 안무를 만든 리정, 트와이스가 참여해 곡과 무대의 완성도를 끌어 올렸다. 이들은 캐릭터들의 감정과 상황을 상세히 설명한 문서를 제작진으로부터 전달 받고 극에 딱 맞는 노래와 퍼포먼스를 만들었다. 버라이어티는 “K팝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뮤지컬 영화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중독성 있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며 OST의 매력을 전했다.

목소리 연기에는 김윤진(헌트릭스 멘토 역), 이병헌(메인 빌런 귀마), 안효섭(사자보이즈 진우)이 힘을 보탰다. 정 평론가는 “단순히 한국 문화를 수출하는 한류를 넘어, 글로벌 자본과 협업해 현지화된 콘텐트를 함께 제작하는 새로운 차원의 제작 방식이 가능해졌다”며 K콘텐트의 또 다른 확장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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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과 라면을 먹는 헌트릭스 멤버들. 식탁에 깍두기, 국밥, 호떡, 컵라면, 어묵탕 등이 올려져 있다. 사진 넷플릭스

국내에선 미국 애니메이션임에도 동양적 색채를 뭉뚱그려 표현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한국적 요소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코엑스, 남대문 시장 거리, 낙산공원, 남산타워, 잠실주경기장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배경으로 나올 뿐만 아니라 ‘차 없는 거리’, ‘출입금지’ 등 실제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간판까지 표현했다. 까치와 호랑이는 전령으로 등장해 작호도를 떠올리게 하고, 일월오봉도 배경으로 춤을 추는 헌트릭스 의상엔 노리개가 달렸다.

조선시대 월도, 무당 무구인 신칼, 부채 등을 헌트릭스의 무기로 내세운 점도 눈길을 끈다. 선캡 모자를 쓴 아줌마, 초록색 때수건으로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할아버지, 한약 냄새가 나는 한의원, 기운이 빠졌을 때 먹는 국밥, 비활동기엔 라면과 분식을 즐기는 걸그룹 등 섬세한 요소들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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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호도를 연상하게 하는 호랑이와 호랑이 머리 위에 눈 세 개 달린 까치. 사진 넷플릭스

정 평론가는 “한국 문화가 문화원형(특정 문화의 본질적인 요소나 특징을 나타내는 원형적인 모델)으로 인식되어 미국에서 중심 서사로 활용되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본다. 억지스러운 차용이 아닌 치밀한 고증 기반의 해석으로 신뢰성과 재미를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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