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트럼프 원맨쇼’로 끝난 나토…“유럽, 트럼프 분노 발작 피하려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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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정상회의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질문을 할 기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AFP=연합뉴스

“유럽 지도자들은 미국 대통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어려운 질문을 회피하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지난 24일(현지시간)부터 이틀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정상회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WP)의 대표적 칼럼니스트 리 호크스타더가 26일 칼럼에서 밝힌 총평이다. 과거 집권 1기 때인 2018년 나토 탈퇴를 협박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혹여나 이를 실행에 옮길 경우 ‘대서양 동맹’이 산산조각 날 것을 우려한 유럽 각국 정상들이 ‘트럼프 심기 경호’에 집중하며 정작 다뤘어야 할 질문은 회피하고 침묵을 지켰다는 비판에서다.

이번 나토 회의는 회원국 국방비를 2035년까지 국내총생산(GDP) 대비 5%로 늘린다는 내용의 공동성명과 함께 막을 내렸다. 동맹국의 안보 무임승차를 비판하며 방위비 인상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트럼프 대통령 요구가 관철된 결과다. 그 대신 대(對)러시아 견제 전략 등 대서양 동맹의 근간이 되는 핵심 어젠다는 이번 논의에서 쏙 빠졌다. ‘트럼프 원맨쇼’였다는 비판적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방위비 GDP 5%’…트럼프 “내가 해내”

트럼프 대통령은 방위비 대폭 증액 공약을 두고 자신의 정치ㆍ외교적 성과라며 한껏 부각시켰다. 그는 공동성명 채택 후 기자회견에서 “기념비적 승리”라며 “미국에 엄청난 승리일 뿐만 아니라 유럽, 서구 문명 전체에도 큰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그들은 ‘당신이 해냈다’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제가 했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회견장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방위비 5%’ 공약의 실현 전망을 두고는 벌써부터 일각에서 회의론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장기적인 목표로 일부 국가는 달성하지 못할 수 있다”고 짚었다. 스페인은 공동성명에서 서명하면서도 “GDP의 2.1%만 지출하고도 나토 전력증강 계획을 충족할 수 있다”고 했고, 벨기에ㆍ슬로바키아 역시 5%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것임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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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회원국 GDP 대비 국방비 비중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NATO,BBC]신

성명문 1장, 427단어…‘트럼프 스타일’

이번 나토 정상회의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모두 여느 때와 확연히 달랐다. 우선 형식 면에서 통상 두세 차례 열렸던 본회의는 올해 한 차례로 축소됐고, 지난해 조 바이든 행정부 당시 미 워싱턴 DC에서 열렸던 정상회의에서 총 44개 문단, 5341개 단어로 발표됐던 공동 성명문은 올해 A4 1장에 5개 문단, 427개 단어로 확 줄었다. 짧고 간결한 방식을 선호하는 트럼프 스타일이 반영된 거라는 분석이 많다.

성명문 길이만 짧아진 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나토 핵심 의제들이 줄줄이 뒷전으로 밀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공동성명에서는 쟁점이 됐던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문제와 관련해 구체적인 로드맵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나토 가입을 ‘불가역적인 길’로 규정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이 종결되면 지체 없이 가입 인정을 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번 성명에서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문제는 제외됐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매년 나토 회의에서 “침략자 러시아를 강력 규탄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던 것과는 달리 올해는 러시아에 대해 “유럽ㆍ대서양 안보에 대한 장기적 위협”이라고 톤다운돼 짤막하게 거론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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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정상회의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나토 사무국

“우크라 지원, 러ㆍ中 논의 빠져”

미국 내 대서양 동맹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다뤄야 할 주요 과제가 누락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토리 타우시그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유럽담당 국장은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4년째 지상전이 진행 중이지만 우크라이나를 위한 유의미한 논의 성과가 없었다. 러시아에 대한 미래 정책도, 중국 도전 과제에 대한 논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미 외교안보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필립 디킨슨 부소장 역시 “지난해 공동성명에서는 동맹의 국방 현대화 노력, 우크라이나 지원, 중국ㆍ이란ㆍ북한의 전략적 도전에 대한 광범위하고 상세한 조항이 포함됐지만 올해는 중국ㆍ이란ㆍ북한 언급이 없었다”며 “이번 헤이그 선언은 트럼프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춘 것”이라고 평했다.

“트럼프에 던졌어야 할 질문 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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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포스(WP) 칼럼니스트 리 호크스타더가 26일(현지시간) 쓴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다’는 제목의 칼럼. 사진 WP 홈페이지 캡처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했기 때문이라는 게 리 호크스타더 칼럼니스트의 분석이다. 그는 WP 칼럼에서 “유럽에서 트럼프보다 더 많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다”며 “유럽 사람들은 미국의 강경파를 자극할까 두려워 어려운 진실을 피해 가고 트럼프가 이미 끼친 피해를 왜곡하는 데 힘썼다”고 짚었다. 유럽 지도자들이 ‘트럼프의 분노 발작’을 피하려는 과정에서 정작 던졌어야 할 질문들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가령 ▶‘독일을 위한 대안(AfD)’ 등 유럽 극우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유럽 안보에 저해가 되는 것 아닌가 ▶이란의 중요 동맹국인 러시아에 맞서는 결의는 왜 보이지 않는가 ▶나토 (집단방위 조항인) 5조 확약을 주저하는 것이 유럽 안보 동맹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아닌가 등을 예시했다.

문제는 ‘방위비 5% 청구서’가 한국에도 곧 날아들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이미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지난 18일 나토 회원국이 ‘GDP 5% 국방비’ 지출에 사전 합의한 사실을 거론하며 이를 ‘동맹 방위비 지출의 새로운 기준’이라고 부른 뒤 “아시아를 포함해 전 세계 동맹국에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했었다. GDP 5% 방위비라는 나토 룰이 한국 안보 비용을 둘러싼 압박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의미다. 지난해 한국의 국방비는 GDP 대비 2.8%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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