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누전되자 아궁이’ 광명아파트 필로티…“전국 30만채 점검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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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1층 주차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한 아파트에서 18일 경찰과 소방, 국과수 등 관계자들이 합동 감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 광명시 아파트 화재로 희생된 박모(66)씨의 남동생 박재성(62)씨는 지난 17일 오후 9시3분 형과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 박씨는 “2층에 사는 형님이 ‘밖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난다’고 하길래 같이 사는 어머님이 떠든다는 줄 알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2분 뒤 오후 9시5분 “아파트 1층 주차장 천장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소방에 접수됐다. 오후 9시37분 형 박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저층에 사는 주민은 이상을 감지한 뒤 손쓸 틈 없이 불과 연기가 아파트 내부를 덮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박씨를 비롯해 3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 광명시 소하동 아파트 화재에서 1층 필로티가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방에서 산소가 공급돼 불이 빠르게 확산하는 데다가 1층 출입구 외에 대피할 길이 없는 구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20일 경찰과 소방당국은 10층 아파트의 1층 장애인 주차구역 천장의 전선을 한 데 모아 정리한 케이블 트레이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트레이에서 합선이 발생한 흔적인 단락흔이 발견되면서다. 소방은 천장에서 시작된 불로 차량까지 연쇄 폭발하면서 화재가 커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필로티 아래 주차된 차량 25대는 모두 불탔다.

필로티 건물은 주차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등 장점 덕분에 2000년대 전국에 퍼졌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23년 6월 기준 전국의 필로티 건물은 총 30만3980동이고, 그중 주거용이 25만7197동이다.

하지만 화재에 취약한 구조 탓에 크고 작은 화재가 반복됐다. 2015년 1월 경기 의정부시 한 아파트에선 불로 5명이 숨졌고, 2017년 12월 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에서는 29명이 숨졌다. 당시 필로티 구조가 화재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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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기자

전문가들은 이번 화재에서도 필로티 구조의 단점이 고스란히 노출됐다고 지적한다. 우선 불과 연기가 순식간에 위층까지 올라가는 ‘아궁이 효과’가 나타났다. 게다가 필로티에 출입구가 탈출할 수 있는 대피로마저 막힌다. 이재민 대피소인 광명시민체육관에서 만난 8층 주민 채명식(65)씨는 “‘우리 아파트에 불이 났습니다’ 안내방송이 나온 뒤 바로 현관문을 열었는데, 이미 너무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고 있어서 바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2014년 7월 준공된 화재 아파트는 필로티 관련 규제도 비켜 나갔다. 케이블 트레이 주변의 내부 단열재는 스티로폼 소재 아이소핑크인 것으로 파악됐다. 아이소핑크는 불연재가 아니라 불이 쉽게 붙고 유독가스를 내뿜는다. 정부는 2019년 11월 법 개정을 통해 3층 이상 필로티 건물에서 방화마감재를 의무화했지만 기존 건물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1층 주차장에는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현행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스프링클러 설치는 1990년 6월부터 ‘16층 이상’ 건물에 의무화됐다. 이후 2005년 ‘11층 이상’, 2018년 ‘6층 이상’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불이 난 아파트는 준공 시점 탓에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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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발생한 화재로 외벽이 그을린 경기도 광명 아파트 주위로 20일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 광명=임성빈 기자

방화문이 1층 출입구에 없었던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방화문은 필로티 구조에서 초기 화재 확산을 막는 핵심 역할을 한다. 5층 주민 A씨(61)씨는 “열기에 1층 유리 출입문이 깨지면서 연기가 너무 쉽게 들어왔다. 방화문만 있었으면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고 했다. 박경환 한국소방기술사회장은 “국토교통부가 필로티 구조 공동주택의 방화문과 마감재 현황을 파악해 예산을 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필로티 구조의 의료·청소년수련원 등 피난 약자 이용시설이나 고시원·학원 등 다중이용업시설을 대상으로 ‘화재안전보강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외장재를 교체하고 간이스프링클러를 설치하는 등 공사비용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지난 2020년부터 올해 말까지 약 922억 2300만원이 예산으로 배정돼 있다. 다만 예산 등 문제로 이번 불이 난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전문가 사이에선 주차장 천장에 붙일 수 있는 자동확산소화기 설치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자동확산소화기는 불이 날 경우 일정 온도 이상을 감지해 자동으로 소화 약제를 분사하는 장비다.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에 공동주택의 자발적 설치를 유도하기도 비교적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다. 조선호 전 경기소방재난본부장은 “필로티 건물 화재가 하도 잦아서 자동확산소화기 설치를 고민한 적이 있다”며 “아파트 한 동에 30~50만 원이면 설치할 수 있으니 가성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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