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집∙축사∙노부부까지 쓸어갔어" 유령마을 된 산청마을 통곡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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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9시40분쯤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에 있는 마을 중턱에 벽돌로 된 벽면이 뜯겨진 듯한 집과 파손된 승용차가 서있다. 김민주 기자

“센 물살에 집이 잡아 뜯기다시피 한 곳도 있습니더.” 20일 오전 9시 30분쯤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 이장 강용호(63)씨는 “추가 피해가 걱정돼 주민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 텅 빈 상태”라며 이같이 말했다. 전날 산청군 전역에 극한호우에 의한 초유의 대피령이 내려진 가운데 이 마을에선 주민 2명이 숨지고 2명이 구조되는 등 인명사고가 일어났다.

고도 300m 약초 마을, 집 뜯기고 바위 뽑혔다

이 마을은 산청군청에서 직선으로 약 3㎞(차로 9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기산(616.m) 자락에 있는 해발고도 300m 마을로 산청시내보다 지대가 높다. 주민은 주로 약초나 쌀 등을 경작한다. 전체 10세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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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9시30분쯤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에 있는 마을 중턱에 산사태로 벽면이 뜯어진 듯한 집안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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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9시30분쯤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에 있는 마을 내부 임도에 바위와 뿌리째 뽑힌 나무 등이 나뒹굴고 있다. 김민주 기자

폭이 2~3m 되는 가파른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마을에 오르는 동안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집들이 눈에 띄었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이어지는 하천 주변으론 뿌리째 뽑힌 나무와 잡석이 나뒹굴어 전날 상황을 짐작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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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9시30분쯤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의 마을 중턱에 있는 집 내부에 토사와 잡석 등이 들어차있다. 김민주 기자

하천이 방향을 바꿔 한차례 굽어지는 곳에 있는 마을 중턱엔 벽돌로 된 외벽이 물살에 통째로 뜯겨나간 듯 내부를 훤히 드러낸 2층집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 집 앞에 주차된 차는 바위와 잡석에 부딪힌 듯 찌그러진 채 방치돼있었다. 고지대로 올라가는 마을 삼거리 쪽엔 어른 두 아름 만한 둘레의 바위가 통째로 뽑혀나간 듯한 흔적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씨는 “(어제) 아침부터 폭우에 마을 하천이 넘쳤다. 바위와 잡석이 떠내려오며 (마을에서) 물이 빠지는 길을 막아버렸다. 50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았지만 그렇게 많은 비가 온 것도, 하천이 넘쳐 임도를 덮치는 것도 처음 봤다”며 “그 난리 통에 인명사고까지 난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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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산사태가 난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의 마을 중턱에서 20일 오전 10시30분쯤 산림청 등 직원들이 피해 상황을 파악해 보고하고 있다. 김민주 기자

이어 강씨는 “산청군에서 시내 쪽 소하천을 2년 전 준설 공사했다. 이 공사로 하류 쪽 물 빠짐이 좋아지지 않았다면, 이번 폭우 때 윗마을(내리)은 집이 떠내려갈 정도의 피해를 봤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산청군에 따르면 내리 주민은 인근 경로당과 학교 기숙사 등으로 몸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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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9시쯤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로 들어가는 길이 추가 산사태 우려에 통제되고 있다. 김민주 기자

“이래 가면 우야라꼬” 부리서도 통곡

이날 오전 11시쯤 와룡산(높이 416.7m) 자락에 있는 산청읍 부리 내부마을도 곳곳에 수마가 할퀸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에서는 전날 3명이 숨지고 1명이 크게 다쳤다. 산 정상 방면으로 좌측 약 300m는 기존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폭우로 쏟아진 토사와 성인 몸통만 한 바위, 수목, 건물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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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경남 산청군 산청읍 부리 내부마을의 한 주택에 주인 잃은 고무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곳에 살던 70대 노부부는 전날 폭우와 함께 쏟아진 토사에 휩쓸려 숨졌다. 안대훈 기자

원래 한우농장이 있던 1841㎡(558평) 규모의 땅에는 축사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전날 숨진 70대 노부부의 농장이었다. 사고 순간을 목격한 마을주민 정기호(61)씨는 “행님네 부부와 집주변 잡석 등을 치워 물길을 트는 작업을 하고, 나는 (마을) 아래쪽으로 내려가는데 변압기가 ‘뻥’ 하면서 터지는 거야”라며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바윗덩이와 흙더미가 형님네가 있던 축사를 덮쳤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손주 사랑 컸던 자상한 분들이었는데”

사고 현장엔 축사 아래쪽에 있는 숨진 부부의 집만 남아 있었다. 숨진 부부와 사돈인 최성순(72)씨는 집안에 있는 주인 잃은 고무신을 보며 “이래 가면 우야라꼬. 믿기질 않는다”는 말을 혼이 빠진 듯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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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경남 산청군 산청읍 부리 내부마을 호우 피해 현장을 찾은 한 70대 부부가 연신 '믿기질 않는다'고 혼잣말을 했다. 이들 부부는 전날 이곳에서 산사태로 숨진 70대 노부부와 사돈 관계다. 안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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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경남 산청군 산청읍 부리 내부마을. 전날 폭우와 함께 쏟아진 토사에 휩쓸린 70대 노부부와 20대 여성이 숨진 현장이다. 안대훈 기자

최씨는 숨진 부부의 다른 논밭을 가리키며 “손주들 어렸을 때, 저기서 놀라고 겨울에 물 뿌려 스케이트장도 만들던 자상한 분들이셨는데, 우리랑 속에 있는 얘기도 서로 다 하는 사이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숨진 부부 농장 바로 인근 식당 주인의 20대 딸도 이번 산사태로 세상을 떠났다. 마을 주민은 “엄마가 읍에 뭐 사러 간다고 나간 사이에 딸만 그렇게 됐다”며 안타까워 했다.

관광객 등 34명 고립에 ‘필사의 구조작전’도  

극한호우에 산청 곳곳의 산이 무너져 내리며 필사의 구조작전도 펼쳐졌다. 소방당국 등에 따르면 단성면의 한 마을에서는 지난 19일 오후 5시 10분쯤 갑자기 산이 무너져 내리면서 주민 16명과 관광객 등 총 34명이 고립됐다. 이들은 오후 5시 44분 소방당국에 구조 신고를 했고, 오후 7시쯤 소방대원이 마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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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후 경남 의령군 대의면 일대 마을이 집중호우로 침수돼 소방대원들이 보트를 이용해 고립된 마을 주민들을 구조하고 있다.사진 뉴스1

산사태로 떠내려온 바위와 토사가 길을 막고, 물이 무릎까지 차오른 상황에서 소방대원들은 이들 6시간에 걸친 구조작업 끝에 이들 34명을 모두 구해냈다. 구조작업에 나선 한 소방대원은 “주민 대부분이 70~80대 노인인 데다 불어난 계곡물 때문에 밧줄을 잡고 이동하는 등 대피 과정이 험난했다”며 “소방대원의 지시에 주민 모두 침착하게 따라줘서 고립된 주민 34명을 무사히 구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망ㆍ실종 14명, 응급복구비 등 건의”

경남도는 이날 오후 3시 기준, 이번 극한호우에 따라 경남에서 10명이 사망하고 4명이 실종된 것으로 파악했다. 앞서 실종자 6명 중 2명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사망자가 늘었다. 사망·실종자 모두 산청에서 발생했다. 5829세대 7482명이 인근 경로당과 친척 집, 학교 등지로 몸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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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경남 산청군 산청읍 외정마을에 폭우와 산사태로 토사가 흘러내려 주택 등이 파손되는 등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사진 뉴스1

현재까지 도로·하천 등 공공시설에서 433건, 농경지 등 사유시설에서 63건의 재산피해가 난 것으로 집계됐다. 경남도 관계자는 “복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정부에 특별재난지역 선포, 응급복구비 지원 등을 건의했다”고 밝혔다. 산청군에 따르면 산청에선 공공시설 45건, 사유시설 27건의 재산피해가 났고 인력 660명과 장비 55대를 투입해 공공시설 응급복구 29건(64%)을 완료했다.

지난 3월엔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서 산불이 나 213시간 동안 이어진 끝에 하동군까지 번지며 4명이 숨지는 등 14명의 인명피해가 났고, 삼림 1800여㏊가 불탔다. 이번 산사태 때 시천면에서도 인명사고가 신고됐지만 산림청은 “이번 산사태는 3월 산불 발생 때와는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고”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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