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집이 흘러내렸다, 산청·가평 등 ‘극한 폭우’…닷새간 사망·실종 2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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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상능마을 일부가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무너져내렸다. 토사와 함께 집이 흘러 내리면서 잔해만 남았다. [뉴스1]

20일 오전 와룡산(높이 416m) 자락에 있는 경남 산청군 산청읍 부리 내부마을. 극한 호우로 초유의 전 군민 대피령이 내려진 가운데 전날 산사태 등으로 3명이 숨진 곳이다. 도로는 흙탕물 범벅이었고, 산 정상 방면 왼쪽에 있던 건물들은 잔해만 남았다. 그 자리엔 폭우로 쏟아진 토사와 어른 몸통만 한 바위, 부러진 나무가 널브러져 있었다.

전날 숨진 70대 부부가 운영했다는 한우농장은 축사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고 순간을 목격한 주민 정기호(61)씨는 “행님네 부부와 잡석 등을 치워 물길을 트는 작업을 하고 나는 마을로 내려가는데 변압기가 ‘뻥’ 하면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며 “뒤돌아보니 바윗덩이와 흙더미가 행님 부부가 있던 축사를 순식간에 쓸고 가버렸다”고 했다.

돌밭 된 산청마을…“산불 이어 물난리, 무서버서 우째 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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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경남 산청군 산청읍 외정마을의 한 주민이 돌밭으로 변한 마을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지난 16일부터 ‘극한 호우’가 내린 산청군에서는 산사태와 침수가 잇따르고, 10명이 숨지고 4명이 실종되는 인명피해까지 발생했다. [뉴스1]

노부부 농장 인근 식당 주인의 20대 딸도 산사태로 목숨을 잃었다. 마을 주민은 “엄마가 읍내에 뭐 사러 간다고 나간 사이에 딸만 그렇게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20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16일부터 전국적으로 쏟아진 폭우로 17명이 숨지고 11명이 실종됐다(18시 기준). 전국 15개 시·도, 95개 시·군·구에서 9782세대, 1만3492명이 대피했다. 도로 침수와 하천 시설 붕괴 등 공공시설 피해가 1999건, 건축물·농경지 침수 등 사유시설 피해는 2238건에 달한다.

특히 10명의 사망자가 나온 산청은 폭우로 쏟아진 흙더미와 불어난 물에 도로 곳곳이 막히고, 정전·통신장애까지 발생하면서 사실상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된 곳이 많았다. 산청은 16일부터의 누적 강수량이 793.5㎜를 기록했다. 지난 한 해 산청군 전체 강수량(1513.5㎜)의 절반을 웃돈다. 군민 문모(60대)씨는 “봄엔 불나서 난리더니 여름엔 비 때문에 난리다. 무서버서(무서워서) 우째 사노”라고 말했다.

20일 오전 9시30분쯤 전날 산사태로 2명이 숨진 산청읍 내리에 들어갔지만, 마을은 텅 비어 적막했다. 마을 중턱엔 벽돌로 된 외벽이 물살에 통째로 뜯겨나간 듯 내부를 훤히 드러낸 2층집이 보였다. 이장 강용호(63)씨는 “추가 피해가 걱정돼 주민들이 모두 떠나 텅빈 상태”라며 “50년을 여기서 살았지만 이렇게 많은 비는 처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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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산청군 단성면의 한 마을에서는 지난 19일 오후 5시쯤 갑자기 산이 무너져내리면서 주민 16명과 관광객 등 34명이 고립됐다. 산사태로 떠내려온 바위와 토사가 길을 막고, 물이 무릎까지 차오른 상황에서 소방대원들은 이들을 여섯 시간에 걸쳐 모두 구했다.

광주·전남과 충남, 울산 등도 폭우로 큰 피해를 보았다. 광주는 지난 17일 하루에만 426.4㎜의 비가 내려 하루 강수량으론 1939년 기상관측 이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울산시 울주군에서는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가 물에 잠겼다. 사연댐 상류에 위치한 반구대 암각화는 댐 수위가 53m를 넘으면 물에 잠기기 시작한다. 19일 오전 5시쯤 수위가 53m를 돌파했고, 이날 오후 1시쯤에는 57m까지 올라 암각화는 완전히 잠겼다.

폭우로 큰 피해를 본 충남 예산은 폭우 뒤 닥친 폭염 속에 복구작업이 한창이다. 하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일 오전 찾은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마을회관은 입구부터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닐하우스에서 썩고 있는 수박과 채소, 물에 잠겼던 축사에서 흘러나온 오물 등이 뒤섞인 냄새였다. 회관 앞에서는 포클레인이 마당에 쌓인 폐가구와 쓰레기를 연신 덤프트럭에 옮겨 담았지만 금세 쓰레기가 다시 쌓였다. 수해 복구 지원에 나선 육군 32사단 장병들이 집 안을 오가며 가구를 날라 그나마 힘을 덜었지만, 주민들은 “막막하다, 도저히 기운이 나질 않는다”며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주민들은 “사람이 없다. 복구 인력이 더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복구작업을 하던 의용소방대원은 “여기는 주민이 다 노인이라 군 장병이나 자원봉사자가 없으면 손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범정부복구지원대책본부를 가동했다. 행정안전부와 관계부처, 피해 지역 지자체는 응급복구작업에 들어갔다. 윤호중 행안부 장관은 “피해가 큰 지역에 대해서는 특별재난지역선포를 건의하겠다”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일 특별재난지역을 조속히 선포하는 방안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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