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유선혜 시인 "사랑과 멸종, 두 단어로 삶을 견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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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혜 시인은 첫 시집『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 자신이 좋아하는 소재로 쓴 시들을 포함시켰다. 2부에 등장하는 공룡, 로봇, 별자리 등이 대표적이다. 유 시인은 "(현재는) 뼈로만 볼 수 있는데, 그것만으로 공룡의 삶을 추측해야 한다는 사실이 좋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19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살롱초대석을 진행하는 모습. 사진 문학과지성사

지난해 10월 출간된 유선혜(28) 작가의 첫번째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의 표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공룡은 운석 충돌로 사랑했다고 추정된다/현재 사랑이 임박한 생물은 5백 종이 넘는다/우리 모두 사랑 위기종을 보호합시다”

단순히 ‘멸종’을 쓸 자리에 ‘사랑’을 끼워 넣은 걸까? 그랬다면 그의 시집이 출간 9개월 만에 9쇄를 찍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 다다를 때 이렇게 고백한다. “멸종해, 너를 멸종해” 그즈음 독자는 알 수 있다. 유선혜는 ‘멸종’을 ‘사랑’만큼 의지하는구나.

“멸종은 멀리 보면 인간의 미래이기도 하다. 전엔 끝이 있다는 것이 모든 일을 허무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기에 모든 일이 중요해진다고 생각한다.” 지난 18일, 중앙일보에서 만난 유 작가는 두 단어를 바꿔 놓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것이 소중하지만 동시에 허무한 느낌. 사랑과 멸종 모두 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봤다.”

그는 평론을 실은 조연정 문학평론가의 해석에 마음이 동했다고 한다. 조 평론가는 유 작가의 시에 대해 “멸종을 눈앞에 둔 마음으로 ‘슬픈 동물’처럼 사랑하는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계속 다음을 향해 걸어보자는 ‘우리’이기도 할 때, 미래의 고통은 오늘의 기쁨으로 견뎌질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덕분에 유 작가는 “사랑과 멸종이라는 두 단어를 통해 우리가 삶을 견디고 있다는 게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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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혜 시집『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의 표지. 사진 문학과지성사

밝고 쨍한 표지의 색과는 달리, 당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 여성의 감각과 불안 등 어두운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이에 공감한 젊은 독자들이 그의 시집을 찾았다. 예스24에 따르면, 『사랑과 멸종을…』 구매자 중 2030 여성의 비율은 59.4%에 달한다. 출간 직후 5개월간 시·희곡 부문의 베스트셀러 10~20위권을 유지하다 서울국제도서전 이후인 7월엔 6위까지 반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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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2만부 판매라는 결과에 유선혜는 “꼭 시집이 스스로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합평 경험이 없고 대학에서 시 읽기 동아리를 들어간 것이 전부인 그에게, 자신의 시를 읽은 타인을 만나는 경험은 새로웠다. 그는 “북토크에서 ‘내 얘기 같았다’고 말해주는 독자들을 많이 만났다. 얼떨떨했지만, 감사했다.”고 말했다. 사진 문학과지성사

그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 같은 대학 국문과 대학원을 마치고 현재는 석사 졸업논문을 준비 중이다. 202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첫 시집 『사랑과 멸종을…』은 스무살 때부터 스물 여섯살까지 쓴 시를 모은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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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혜 시인. 사진 본인 제공

글은 어떻게 쓰게 됐나.
“어릴적부터 쓰기와 읽기는 내 삶의 본질적인 요소였다. 학부 때 시 읽기 동아리를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시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취미로 써 온 시를 투고했다가 예상치 못하게 등단한 것이다.”
철학이 소재가 된 시가 눈에 띈다.
“철학자들의 주장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철학에 관해 내가 쓴 시들은 그런 상상에서 출발한 사고실험의 결과다.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그 분야에서 내가 무언갈 만들어내기는 어렵더라. 문학을 생산하는 일은 오히려 더 잘 맞는다고 느낀다.”
어떨 때 시를 쓰나.   
“문득 영감이 떠오르는 편은 아니다. 대부분은 ‘두 단어만 바뀐 쌍둥이 지구가 있다면 어떨까?’ 이런 작은 상상들에서 출발한다. 상상이 머릿속 한 장면으로 정리되면 그걸 시로 다듬어 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생각지 않았던 곳으로 멀리멀리 가기도 하는데, 그 순간이 즐겁다.”
시에서 보면 ‘우울하다’는 대학생 화자에게 ‘시를 읽지 말라’고 조언하는 교수가 나온다. ‘시 쓰기’를 현실과 동떨어진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직접 들은 말을 기반으로 쓴 시다. 하지만 내 삶에서 글쓰기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에 다닌 적도 있는데, 당시엔 돈을 벌고 바쁘게 지냈지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일할 때 으레 그렇듯, 글을 쓰려면 잡다하고 자질구레한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결과물은 아름다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현실적이다.”
좋아하는 시인은?
“최승자, 기형도, 김중식 시인이다. 현재 드러나고 있는 청년의 절망은 미시적인데, 과거에 드러난 청년들의 절망은 사이즈가 다른 것 같다. 분명 지금의 청년들도 실존의 비극 등 당대와 비슷한 문제를 떠올릴텐데,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을 더 꺼내 놓고 싶다."  
앞으로는 어떤 글을 쓰고 싶나.
“몸이 기능하는 한 쓰기와 읽기를 계속하고 싶다. 시 외의 다양한 장르도 시도해보고 싶다. 12.3 비상계엄 이후에 낸 에세이 앤솔러지『다시 만날 세계에서』에 참여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지금 필요한 책이고, 그 책에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11월에 새로운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 『사랑과 멸종을…』에도 자주 등장하는 ‘방’에 대한 시들을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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