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성폭행 맞서다 혀 깨물어 유죄, 61년만에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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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유죄 판결을 받았던 최말자씨가 23일 재심 첫 공판에서 검찰이 무죄를 구형하자 법정을 나서며 “이겼습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성폭력 피해자로서 보호받아야 했을 최말자님께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 피고인(최씨)의 행위는 정당하다. 피고인에 대해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해 달라.” 23일 오전 11시 부산지법 352호 법정. 부산지검 정명원 공판부 부장검사는 피고인석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사죄드린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부산지법에선 10대 시절 성폭행을 시도하는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가 유죄를 선고받은 최말자(78)씨의 중상해 혐의 사건 재심 첫 공판이 열렸다. 정 부장검사는 “최씨에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공판부장이 직접 법정에 선 것도, 심문 없이 무죄를 구형한 것도 이례적이다.

발단이 된 사건은 1964년 5월 6일 경남 김해군(지금의 김해시)에서 일어났다. 당시 만 18세이던 최씨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노모(당시 21세)씨의 혀를 깨물었다. 노씨 혀가 1.5㎝ 잘려 나갔다.

최씨는 이 일로 ‘중상해 가해자’가 됐다. 수사 과정에서 “노씨와 결혼하라”는 등 모멸적인 말도 들었다. 영장도 보지 못한 채 구속됐다고 한다. 법원은 오히려 ‘피해자’ 노씨 처지에 주목해 “혀를 끊어 불구의 몸이 되게 한 것은 정당한 방위의 정도를 지나쳤다”고 판단했다. 65년 1월 최씨에겐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법을 몰라 항소도 못 했다고 한다.

반면에 노씨에겐 강간미수 혐의조차 적용되지 않았다. 특수주거 침입과 특수협박죄로 노씨에겐 최씨보다 가벼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최씨 사건은 이후 형법 교과서에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은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이 사건은 최씨 평생의 상처로 남았다. 그러다 한국방송통신대 등에서 공부하고 ‘젠더폭력’ 개념에 눈뜨며 부당한 판결을 바로잡겠단 결심이 섰다.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공개하며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미투’ 운동 분위기도 최씨에게 용기를 줬다. 그는 증거 자료를 모아 2020년 5월 중상해 사건 재심을 청구했다. 사건 발생 56년 만이다. 1·2심(부산지법·고법)에선 검찰 측 불법 구금(영장 제시 없이 구속)이나 자백 강요 증거가 없고, 정당방위를 인정할 새 증거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반면에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지난해 12월 “(최씨가) 검찰에 약 2개월간 불법 체포·감금된 상태에서 조사받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원심 결정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재심 대상 판결문, 재소자 인명부 등에 대한 법원 사실 조사가 필요하다고 봤다.

무죄 구형을 받고 법정을 나선 최씨는 “지금이라도 검찰이 잘못을 인정하니, 대한민국 정의는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며 “국민들 응원 덕에 이 자리까지 왔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선 오는 9월 10일 선고 때 무죄 구형이 받아들여질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법무법인 파트원 이원하 대표변호사는 “성폭력 사건에서 정당방위를 제한적으로만 인정해 왔던 우리 사법체계에 대해 검찰 스스로 반성한 점이 뜻깊다.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방어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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