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左), 류현진(右)

“다음 번에 둘 다 최고의 피칭으로 다시 맞붙길 기대합니다.”

프로야구 SSG 랜더스 김광현(37)은 ‘낭만’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한해 선배인 한화 이글스 류현진(38)과 18년간 기다려 온 ‘세기의 대결’을 마친 직후였다. 김광현은 지난 26일 대전 한화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해 한화 선발 류현진과 맞대결했다. 둘은 국가대표 원투펀치로 한 시대를 풍미한 21세기 최고 왼손 투수들이다.

지난 2006년 한화에서 데뷔한 류현진과 1년 뒤 SK 와이번스(SSG의 전신) 유니폼을 입고 프로 무대에 데뷔한 김광현은 앞서 단 한 번도 맞붙은 적이 없다. 15년 전인 2010년 5월 23일 대전 경기 선발투수로 나란히 예고됐다가 우천취소돼 무산된 게 유일한 기회였다. 류현진은 11년(2013~23년), 김광현은 2년(2020~21년)간 메이저리그(MLB)에서 뛰었지만, 그때도 같은 경기에 나서는 행운은 오지 않았다.

그 사이 둘은 3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선발 로테이션 한 자리를 지키며 팀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뒤늦게 성사된 첫 맞대결은 그래서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매표소 앞에는 ‘밤샘 오픈런’을 위한 텐트가 등장했고, 관중석은 전국에서 모인 야구팬들로 일찌감치 꽉 찼다. 김광현은 “모두가 그랬듯, 나 역시 이번 등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을 풀 때부터 야구장 분위기나 관심도가 평소와 달랐다”며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이어폰을 끼고 등판을 준비했다.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결과는 의외로 싱거웠다. 1회초 먼저 마운드에 오른 류현진이 안타 4개와 볼넷 2개를 내주고 5실점한 뒤 일찌감치 마운드를 내려갔다. 뒤 이어 올라온 김광현은 6이닝 6피안타 2실점으로 역투해 승리 투수가 됐다. 올 시즌 처음으로 최고 시속 150㎞를 찍으며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부었고, 득점 지원까지 두둑하게 받아 기념비적인 승리(9-3)를 거머쥐었다.

이숭용 SSG 감독은 “나와 선수들 모두 우리 팀 레전드 광현이가 꼭 승리 투수가 되길 바랐다. 팀이 하나가 돼 이기려고 애쓰는 모습이 감동적이었고, 고마웠다”고 흐뭇해 했다.

그래도 김광현은 활짝 웃지 못했다. 그는 “나도 낭만이 있어서, 우리 둘 다 호투해 투수전을 펼쳤으면 했다. 야수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진심으로 그런 장면을 꿈꿨다”고 했다. 그는 또 “류현진 형은 내게 진정한 ‘대투수’다. 늘 내가 뒤를 따르고 올려다보는 입장이었다”면서 “그래서 (경기 결과에) 기분이 엄청나게 좋지는 않다”고 토로했다.

김경문 한화 감독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두 투수의 활약을 앞세워 금메달을 땄다. 그 덕에 내가 지금까지 감독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30대 후반인 두 선수가 성실히 몸 관리를 해 여전히 선발 한 자리를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모두 부상 없이 오래 오래 마운드를 지켰으면 좋겠다”고 덕담했다.

김광현도 이날의 대결이 ‘마지막’이 아니길 기대했다. 그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서로 좋은 컨디션에서 최고의 피칭으로 다시 맞붙었으면 좋겠다”고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