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불평등 줄인 농지개혁, 60년대 '초고속 경제성장' 발판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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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⑫농지개혁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는 2023년 12월 31일 엑스(Xㆍ옛 트위터)에 한반도의 밤을 담은 위성 사진을 올렸다. 환히 빛나는 남한과 칠흑 같은 북한이 선명하게 대비됐다. 사진에는 ‘미친 아이디어: 한 나라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로 반씩 나눠 70년 뒤에 확인해 보자’라는 글이 덧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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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비교하며 X에 올린 한반도 야경. [사진 X 캡처]

머스크는 사진 한장으로 남북한의 경제 격차를 직관적으로 보여줬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분법만으로 그 격차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를 택했더라도 저성장에 시달린 국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고성장에는 뭔가 다른 요소가 더 있다는 소리다. 경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통으로 꼽는 요소가 바로 ‘평등한 토지 분배’다. 다시 말해 일부 대지주와 다수의 소작농으로 이뤄진 토지소유 체제를 자영농 중심으로 바꾼 농지개혁이다.
세계은행 소속 경제학자 클라우스 다이닝거가 낸 보고서 ‘성장과 빈곤 퇴치를 위한 토지 정책’(2003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평등하게 토지를 분배한 나라일수록 1960~2000년에 빠른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ㆍ대만ㆍ일본이 대표적이다. 반면 제대로 토지개혁을 하지 못한 중남미 국가들은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그래픽). 광복 직후 미 군정이 시동을 걸고 이승만 정부가 이어받은 농지개혁은 이렇게 한국 경제 발전의 밑바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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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기자

해방 당시 국민의 대다수인 약 80%가 농민이었고, 그중 70%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적게는 소출의 50%, 많게는 70~80%를 소작료로 낸 소작농들의 삶은 비참했다. 이런 구조를 바꾸기 시작한 ‘트리거’는 미 군정이었다. 사실 미 군정보다 북한이 앞서 46년 3월 5일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일본인 지주, 친일파와 대지주의 농지를 몰수해 소작농 등에게 무상 분배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를 내세워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은 같은 달 일본에서 지주의 농지를 사들여 소작농에게 유상 분배하는 농지개혁 계획을 발표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공산주의에 밀릴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미 군정은 한국에서도 같은 토지개혁을 하려 했다. 하지만 지주들이 많았던 한국민주당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승만은 46년 2월 발표한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서 농지개혁 의지를 밝혔으나, 묘하게도 미 군정의 토지개혁 추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좌익은 북한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며 반대했다.
실행은 하지 못하고 2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농지개혁이 꼭 필요하다고 봤던 미 군정은 우선 옛 일본인 지주 소유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유상 분배했다. 48년 3월의 일이었다. 이는 두 달 뒤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5ㆍ10 총선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좌익 세력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해 후보를 내지 않고 폭력으로 선거를 방해했다. 선거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 습격이 350여 건이었다. 그런데도 투표율이 95.9%에 이르렀다. 농민들이 미 군정의 농지개혁을 보고 ”우파 정부도 우리 편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좌익 세력의 방해를 뚫고 한 표를 행사한 것이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경제 발전을 위해 극심한 불평등 해소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이승만이 가졌다는 의견이 그 하나다. 지주 중심의 한국민주당이 이승만과 대척점에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이승만은 농민의 지지가 필요했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이 먼저 치고 나간 농지개혁 없이는 남한이 체제 수호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인식도 당시 정치권에 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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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8월 9일 수해를 입은 영남 지역을 찾아 농민을 위로하는 이승만 대통령. [중앙포토]

49년 6월 농지개혁법안이 마련됐다. ‘유상 매입ㆍ유상 분배ㆍ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라 지주의 농지는 3헥타르(약 9000평)로 제한하고, 초과분은 정부가 연평균 생산액의 1.5배로 매입해 농민들이 같은 값에 사게 하는 내용이었다. 당장 돈이 없었던 정부는 지주에게 ‘지가증권’으로 보상했고, 농민은 매년 생산의 30%를 5년간 현물로 내면 자기 땅이 되도록 했다.
지주 출신 정치인들은 ‘사유재산 침해’를 들어 극렬하게 저항했다.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농지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들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농지개혁을 무산시키기보다 땅값을 더 받아내려는 목적이었다. 토지를 미리 자식에게 증여하거나 허위 계약서를 작성하는 식으로 법망을 피해간 지주들도 있었다.
저항을 뚫고 50년 3월 농지개혁이 시행됐다. 6ㆍ25 전쟁의 와중에도 정부는 51년 시행규정을 마련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전국 단위의 농지개혁이 시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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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5월 31일 발행한 지가증권. 농지를 유상 매입하는 대가로 지주들에게 줬다.[한국학중앙연구원]

북한은 전쟁 중 “남한 점령지에서 농지개혁을 하면 농민이 환호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북한 방식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였다. 정확히 말해 땅을 국유화한 뒤 개인에게는 경작권만 주는 것이었다. 이는 ‘소유와 상속’이라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채워줄 수 없었다. 결국 북한이 바랐던 남한 농민의 전폭적인 지지는 없었다. 농지개혁이 곧 공산화 저지의 숨은 방파제였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토지개혁을 해서 한국전쟁이 터졌는데도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체제를 지켜냈다(2004년 11월 칠레 산티아고 교민 간담회)”고 말한 바 있다.
농지개혁의 결과 해방 직전 10%대였던 자작농 비율은 80% 이상으로 급증했다. 농지개혁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적 신분 질서도 무너뜨렸다. 농지를 처분한 대지주 중 일부가 재빨리 돈을 산업에 투자하면서 ‘공상(工商)’의 지위가 올라갔다.
그러나 지주 상당수는 농지 처분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갖고 있다가 전쟁을 맞았다. 전쟁 통에 환금하려는 지주들이 몰리면서 지가증권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이런 지주들은 산업자본으로 전환할 기회를 잃고 몰락했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자작농 사회의 형성은 경제 성장과 산업화의 사회적 토대가 됐다. 자작농은 우선 자녀 교육에, 그러고도 여유가 있으면 저축을 했다. 저축은 박정희 정부 산업화 정책의 금전적 자본이 됐고, 교육은 인적 자본을 키웠다. 결국 농지개혁과 이후의 산업화 정책의 결합이 한국 경제 발전의 핵심축이 된 셈이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옛 소련과 북한의 집단농장은 물론, 농지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시아ㆍ중남미 국가들과도 확연히 구분된다. 인도의 간디도 실패했고, 필리핀은 지주의 토지 독점으로 국토 개발에 한계를 겪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도 “브라질은 한국처럼 농지개혁을 하지 못해 불균형 성장을 겪었다”고 고백했다.

지주 땅 사들여 소작농에 유상 분배 #미 군정 시동 걸고 이승만 본격 추진 #'토지 국유화' 북한과 대조적 #남한 농민들, 북한 방식에 등 돌려 #늘어난 자영농, 저축·교육에 투자 #60년대 성장·산업화 토대 닦아

이승만의 농지개혁 파트너, 사회주의자 조봉암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추진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택한 인물은 지주 중심의 농업 체제 철폐를 주장해온 죽산(竹山) 조봉암(1898~1959)이었다. 모스크바대에 유학하고 전조선 공산당원이었던 조봉암은 급진적 혁명 대신 점진적으로 재분배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평가된다. 이승만이 농지개혁에 나섰을 때 지주가 많은 한국민주당의 반발은 극렬했다. 이런 상황도 농지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조봉암을 기용한 배경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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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으로 법정에 앉아 있는 조봉암(왼쪽)과 관계자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는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 정권에 도전했다. 진보당 후보로 출마해 200만 표(23.8%)를 얻었다. 그러나 2년 뒤 북한 간첩들과 접선해 북한의 통일론을 주장했다는 누명을 쓰고 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59년 7월 3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52년이 흐른 2011년 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그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조봉암의 비극적 최후는 정쟁으로 얼룩진 한국 정치의 흑역사를 보여준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첫 작품은 『도덕감정론』이었다. 이기심만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진 스미스도 사회 질서의 기본원리로 사회적 공감을 강조했다. 애초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이승만과 조봉암이 농지개혁을 통해 사회적 공감을 얻으려 손을 잡았다가 결국 갈라 선 것은 한편의 아이러니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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