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청계천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소녀상 앞 속죄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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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3일,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비에서 일본군위안부 사건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울밑에 선 봉선화를 플루트로 연주한 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청계천 빈민의 성자’로 불린 일본의 사회운동가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 목사가 향년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8일 푸르메재단에 의하면 노무라 목사는 악성 림프종 진단을 받고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지난 26일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식은 치르지 않는다.

1931년 교토에서 태어난 노무라 목사는 반평생 한국에 대한 봉사에 힘썼다. 1958년 처음 한국에 왔을 당시 목격한 일제의 식민 지배 잔재와 6·25 전쟁의 후유증이 그 계기가 됐다. 이후 1973년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 청계천 빈민가를 방문한 뒤 충격을 받은 그는 고 제정구 의원과 함께 본격적으로 빈민 구호에 나섰다. 일본과 독일, 뉴질랜드 등에서 모은 기금에 더해 어머니가 물려준 도쿄 자택까지 팔며 탁아시설 건립 등을 지원했다.

그가 한국을 60여 차례 방문하며 청계천 빈민을 위해 전달한 돈은 7500만엔, 한화 약 8억원에 달한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사회 정의 운동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배웠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노무라 가스코 여사는 일본 내 소비자 운동으로 2005년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노무라 목사는 구호 활동과 함께 당시 우리나라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도 했다. 그는 청계천과 동대문시장, 구로공단 등 우리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남긴 사진 자료 약 2만점을 2006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2013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기증한 사진들에 대해 “1970년대 어려운 시절에 몰래 찍어둔 사진을 한국인들에게 다시 돌려드릴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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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 제정구 의원과 청계천 빈민구호 활동을 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의 모습. 사진 푸르메재단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무릎 꿇고 속죄 

노무라 목사는 일제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목소리를 냈다. 2012년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 무릎을 꿇고 일본 과거사에 대해 속죄한 그는 이후 일본 우익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한국 사회 약자를 위한 활동을 이어왔다. 2009년부터 푸르메재단을 매년 방문해 장애어린이와 그 가족을 만났으며,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을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해 기부했다. 2013년에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농성장을 방문해 평화로운 해결을 바란다고 전하기도 했다.

노무라 목사는 국적과 세대를 초월한 박애 정신을 인정받아 2015년 제1회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당시 수상 소감으로 “청계천 빈민 구제 활동만으로 속죄의 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여생을 더욱 겸허하게 한국인들을 통해 배우고, 서로 사랑하고 싶다”고 밝혔다.

노무라 목사의 아들 마코토(眞理)는“아버지는 수입이 줄어든 노후에도 조금씩 저축해 기부를 이어나갔다”며 “자신을 낮추면서 성경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날마다 실천하신 것”이라고 전했다.

노무라 목사와 오랜 인연을 이어온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는 “마지막 소원을 묻는 말에 ‘아들 마코토가 한국 장애어린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며 환하게 웃던 노무라씨 모습이 떠오른다”며 “고인이 한국 사회에 남긴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이 더 큰 희망으로 자랄 수 있도록 잘 지켜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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