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들보다 낫네"…바닷마을 '은퇴 맥가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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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화정동 마을지킴이들이 화이팅을 외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사진 좌측부터 김창식, 이항규씨다. 김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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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남목동 마을지킴이들이 화이팅을 외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사진 좌측부터 김지철, 김기환씨다. 사진 울산 동구

"배 만들고 엔진 다루고 집까지 짓던 손입니다. 못 박고 싱크대 고치고, 형광등 교체하는 것쯤은 '뚝딱' 해치웁니다" 지난 21일 오전 울산 동구 화정동. 동해 일산항 근처 바닷마을 골목길에는 파란 작업복을 입은 두 남성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허리에 공구가방을 찬 이항규(67)씨와 김창식(67)씨가 동네 순찰 중이었다. "저소득층과 노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데, 보도 블럭이 튀어나오진 않았는지, 고장 난 가로등은 없는지 같은 것을 살펴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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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상단 좌측부터 강춘석. 제갈태열. 이명열. 김진범씨. 사진 하단 좌측부터 김지철, 김기환, 김창식 이항규씨. 사진 울산 동구, 김윤호 기자

동갑내기 두 사람은 일상이 된 듯 마을을 살핀 뒤 가방 속 공구를 점검했다. 망치, 실리콘 총, 드릴, 나사, 낡은 샤워기 교체 부품까지 빈틈없이 준비돼 있었다. 이들이 향한 곳은 거동이 불편한 80대 독거노인의 집이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라며 인사를 건넨 뒤 이들은 곧장 집 안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뚝딱' 하고 10여분만에 수건걸이와 안전바를 달았다. "아들보다 낫네"라는 노인의 칭찬에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면서 "어르신 다음에도 불편한 거 있으면 꼭 불러주세요"라고 했다.

이씨와 김씨는 각각 37년, 35년을 HD현대중공업에서 배관·엔진 기술자로 일했다. 조선소에서 쇳덩이를 다루던 손은 여전히 단단했고, 기술도 녹슬지 않았다. 은퇴 후 '마을지킴이'로 조선소가 아닌 바닷마을로 다시 출근하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배가 아니라 이제 형광등을 갈고, 싱크대 누수를 고쳐요. 현역 때 배운 기술로 사회에 보탬이 됐음 해요." 두 사람은 기계·배관·용접 등 수십 년 간 쌓아온 기술을 주민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김씨는 기계기능사 자격을, 이씨는 용접배관기능장에 용접직업능력교사 2급, 조경기능사까지 갖춘 '멀티 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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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전하동 마을지킴이들이 화이팅을 외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사진 좌측부터 이명열, 김진범씨다. 사진 울산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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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방어동 마을지킴이들이 화이팅을 외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사진 좌측부터 강춘석, 제갈태열씨다. 사진 울산 동구

시니어 기술자들의 두번째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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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방어동 마을지킴이들이 문 수리를 하고 있다. 사진 울산 동구

최고의 '시니어' 기술자들이 은퇴 후 마을의 불편을 고쳐주는 손이 됐다. 울산 동구 화정동을 비롯해 방어동, 전하동, 남목동 등 4개 마을에는 은퇴한 기술자들이 '마을지킴이'로 활약하고 있다.

마을마다 2명씩 총 8명의 지킴이가 활동 중이다. 이 중 막내는 예순, 큰형은 칠순이다. 환갑의 막내 방어동 지킴이 제갈태열 씨는 현역 때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했다. 그래서 커튼 달아주기 같은 일은 누구보다 손이 빠르다. "전기도 잘 다루고, 집 관련 일은 평생 해온 일이라 누구보다 자신 있습니다." 전하동 지킴이 이명열(68)씨는 가구공장을 운영했다. 유명 기업에서 25년간 선박가구도 제작했다. 그래서 나무 관련된 일은 누구보다 능숙하다. 못을 박고 문 도어록 교환, 경첩 교체 같은 일은 그가 손만 대면 금방 새것처럼 된다. 방어동 지킴이 강춘석(64)씨는 배관, 용접, 정비 일을 29년간 한 달인이다. 특히 건축배관기능사, 가스기능사, 보일러취급기능사, 전기용접기능사 등 기술 자격증만 4개를 가져 '맥가이버'로도 불린다.

큰형 남목동 지킴이 김지철 씨는 삼성 비투비 에어컨 기술자 출신이다. 전기, 설비, 배관 못하는 게 없는 척척박사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칠순의 '베테랑'으로 불리며 칭찬이 자자하다. "마을지킴이들 모두 현역 때보다는 작은 일을 하지만, 은퇴 후 두 번째 출근길이라 다들 보람을 느낀다고 해요." 김씨의 말에 마을과 다시 이어진 삶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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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박기 작업 중인 마을지킴이. 사진 울산 동구

당일 처리, 문고리 수리까지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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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킴이들이 공구가방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울산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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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화정동 지킴이인 김창식씨가 형광등을 갈아주고 있다. 사진 울산 동구

마을지킴이는 울산 동구청의 지원 아래 민원과 생활 불편 사항을 무료 또는 최소 실비로 처리한다. 서비스는 전화나 방문으로 신청이 가능한데, 공구와 자재만 있으면 당일 처리가 기본이다. 마을 행정복지센터 바로 옆에 마을지킴이 사무실인 '마을관리소'가 자리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유사한 민원 서비스는 운영되고 있지만, 은퇴한 기술자들이 중심이 돼 구성한 마을지킴이 팀은 이례적이다.

하루 평균 마을별 민원 접수는 10건 안팎. 형광등 교체부터 싱크대 누수, 문고리 수리, 부러진 의자 수리, 못 박기, 수건걸이 달기, 변기 수리 등 다양하다. 민원은 대부분 저소득층이나 노년층 요청이다. 방어동 주민 김모(72)씨는 "공구도 없고 손재주도 부족한데 마을지킴이들이 있어 생활이 한결 편해졌다"고 전했다.

은퇴 기술자 인력 풍부한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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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대 아래 수전 작업을 하는 마을지킴이. 사진 울산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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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구 화정동 이항규씨가 문고리를 달아주고 있다. 김윤호 기자

울산은 대기업 공장이 밀집해 있어 은퇴 기술자 인력이 풍부하다. 이로 인해 마을지킴이 선발 경쟁도 치열하다. 비록 1년 계약제로 운영되고 급여도 많지 않지만 지원은 꾸준하다. 실제 지난해 마을지킴이 신규 채용에서 8명 모집에 35명이 몰려 4.4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서류와 면접으로 뽑는데, 지원자의 66%는 조선소, 자동차 등에서 은퇴한 기술자들이다. 이들이 보유한 자격증만 해도 수십 가지에 달한다.

마을지킴이 사업은 '해피생활민원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됐다. 그러다 이달부터 울산 동구청이 직접 시스템을 정비해 마을지킴이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했다. 이주향 울산 동구청 민간협력팀장은 "단순한 봉사를 넘어서 은퇴자의 전문 기술을 지역에 환원하는 새로운 사업이 마을지킴이"라면서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고 거기에 더해 은퇴자들의 일자리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사업이 되도록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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