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구속돼보니 방어권 보장 없었다"…25년차 수사 베테랑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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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오후 전북 전주시 중화산동 한 병원에서 전직 경찰관 A씨(54)가 휠체어에 탄 채 기자를 맞았다. 전주 완산경찰서 소속 경위로 재직 중이던 A씨는 지난해 11월 8일 전주지검 구치감으로 호송 중이던 여성 피의자 B씨(40)의 신체 일부를 만지고 입맞춤한 혐의로 지난 1월 구속 기소됐다. 지난 22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준희 기자
3대째 경찰 가문…“하루아침에 파렴치한 낙인”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지난 27일 오후 5시쯤 전북 전주시 중화산동 한 병원. 전날 허리(협착증) 재수술을 받은 전직 경찰관 A씨(54)가 휠체어에 탄 채 “검찰 수사는 우격다짐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25년 차 수사 베테랑이었던 A씨는 “8개월 전 하루아침에 파렴치한으로 낙인 찍혔다”고 했다. 전주 완산경찰서 소속 경위로 재직 중이던 지난해 11월 8일 오후 1시 40분쯤 전주지검 구치감으로 호송 중이던 여성 피의자 B씨(40)의 신체 일부를 만지고 입맞춤한 혐의(강제추행·독직가혹행위)로 지난 1월 24일 구속 기소됐다.
A씨는 “그런 적 없다”고 펄쩍 뛰었지만, 검찰이 지난해 11월 22일 압수수색에 나서자 직위 해제됐다. 지난 1월 7일 구속된 뒤 4월엔 파면됐다. 조부·부친에 이어 3대가 경찰 제복을 입은 A씨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아버지처럼 강직한 수사관이 되겠다”며 경찰을 준비하던 A씨 딸(20대)도 충격을 받았다. A씨는 “너무 억울해 변호사에게 ‘차라리 죽겠다’고 유서를 보냈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8일 전주지검 구치감 현관 앞에서 A씨(왼쪽)가 출입 카드가 없어 피의자 B씨와 서 있는 모습이 찍힌 CCTV 영상 캡처. 검찰은 "A씨가 오른손으로 B씨 왼쪽 볼을 만진 것"이라고 봤지만, 1심 법원은 A씨가 오른손에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면서 B씨 얼굴 방향으로 왼손을 뻗은 장면을 근거로 "객관적 사실관계에 명백히 반한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사진 A씨
대검 과학수사 우수 사례…1심 “믿기 어렵다”
반면 대검찰청은 지난 4월 A씨 사건을 과학 수사 우수 사례로 꼽았다. 검찰은 A씨에게 징역 7년, 자격 정지 7년 등을 구형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전주지법 형사3단독 기희광 판사는 지난 22일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병실에서 교도관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뒤에야 A씨 손목·발목을 옥죄던 수갑이 풀렸다.
경찰수사연수원에서 5년간 신입 경찰관에게 수사 실무를 가르치던 A씨는 위암에 걸린 80대 노모를 가까이서 보살피기 위해 지난해 2월부터 전주 완산경찰서에서 근무했다. A씨는 “지난해 11월 1일 타인 명의로 향정신성 의약품(졸피뎀)을 처방받은 혐의로 체포된 B씨가 상습·조직적으로 마약을 판매한 것으로 보고 여죄를 캐려다 성추행범으로 몰린 것 같다”고 의심했다. B씨가 본인 수사를 중단시킬 목적으로 A씨를 고소했다는 취지다.(※A씨에 따르면 사기와 의료보험법·주민등록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B씨는 지난 4월 1심에서 집행유예형을 받고 풀려났다. A씨 고발로 수사에 착수한 전북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최근 B씨를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한다.)
A씨는 “피의자가 거짓말하거나 증거를 숨긴다 싶으면 구속영장을 치는(신청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막상 내가 구속되고 보니 방어권 보장이 전혀 안 됐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아무리 B씨 진술이 오락가락하고 성추행 주장과 모순되는 폐쇄회로(CC)TV 영상과 동료들 진술을 제시해도 검찰은 혐의가 있다고 결론 내고 수사를 밀어붙였다. ‘쇠귀에 경 읽기’였다”고 토로했다. 그는 “기소 자체를 목표로 수사하고 기소에 맞춰 사건을 조작하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는 이재명 대통령 발언을 인용하며 “공감이 갔다”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취임 첫 공식 기자회견 '대통령의 30일, 언론이 묻고 국민에게 답하다'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법원 “피해자 진술 일관되지 않아”
공소장에 적힌 A씨 범행은 ①전주지검 청사 근처에서 B씨 어깨·허리를 감싼 행위 ②구치감 현관 앞에서 오른손으로 B씨 왼쪽 볼을 만진 것 ③구치감 대기실에서 B씨 가슴을 만지고 입맞춤한 행위 등 세 가지다. 그러나 법원은 “신체 접촉 부위에 대한 피해자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고, CCTV에서도 범행을 단정할 만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① 행위에 대해 재판부는 “CCTV 영상엔 당시 피고인이 B씨 어깨·허리 부분을 감싸는 장면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피고인이 오른팔을 B씨 등에 둔 채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은 호송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② 행위에 대해선 A씨가 오른손에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면서 B씨 얼굴 방향으로 왼손을 뻗은 장면이 찍힌 CCTV 영상을 근거로 “객관적 사실관계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B씨는 사건 당일 해바라기센터 조사에서 “A씨가 어느 쪽 볼을 만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검찰 조사에선 “왼손으로 왼쪽 뺨을 만졌다”→“왼손으로 오른쪽 뺨을 만졌다”고 말을 바꿨다. 정작 B씨 오른쪽 뺨에선 A씨 DNA가 검출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8일 전주지검 구치감 대기실 앞 복도에서 A씨(가운데)가 왼손에 피의자 B씨 짐이 담긴 종이 가방, 오른손엔 휴대전화를 든 채 B씨(왼쪽)와 함께 인권보호관 상담실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은 CCTV 영상 캡처. 당시 현장에 있던 전북경찰청 형사기동대 직원들은 모두 법정에서 "대기실에서 일어난 일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사진 A씨
“객관적 증거에 반하는 점 많아”
재판부는 ③ 행위에 대해 “객관적 증거 또는 상황에 반하는 점이 많다”고 밝혔다. B씨가 “인권보호관 및 검사에게 성추행 피해 사실을 얘기하면서 DNA 검사를 위해 최소 1시간 정도 침을 삼키지 않고 있다가 뱉었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재판부는 “진술의 신빙성이나 DNA 감정의 정확성을 위해 면담 초기에 타액에서 샘플을 채취하도록 요청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진한 키스 후 여성 구강 안에서 남성 DNA를 검출할 수 있는 시간은 침을 뱉지 않은 상태에서 30분 이내라는 연구 결과가 보고됐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전문가 증언도 근거로 댔다.
이와 함께 B씨는 해바라기센터에서 “당시 수갑을 차고 있었고, 골절된 상완골(어깨와 팔꿈치 사이 긴 뼈)이 붙지 않은 상태라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A씨는 구치감 대기실에 들어가기 전에 B씨 수갑을 풀어줬고, 뼈도 오래전 부러져 대부분 치유된 상태였다.

지난해 11월 4일 전북 전주 한 병원 응급실에서 A씨(왼쪽 두 번째) 등 전주 완산경찰서 소속 남녀 수사관 3명이 치료를 마친 피의자 B씨(흰색 조끼)를 데리고 전주 덕진경찰서 유치장으로 향하고 있다. B씨는 "어깨 골절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돼 통증이 심하다"고 했지만, 진즉 완치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날 병원에서 B씨는 A씨에게 부축해 달라며 A씨 손을 잡거나 어깨에 기댔다는 게 A씨 변호인 측 주장이다. 사진 A씨
A씨 “현업 복귀 목표”…檢 “법리 오해” 항소
A씨를 변호한 법무법인 ‘해온’ 구본승 대표변호사는 “검찰은 ‘B씨 몸에서 나온 DNA 양은 직접 접촉에 의해서만 가능한 수치’라는 국과수 전문가 의견을 수사 보고서에 담았다”며 “법정에서 국과수 전문가를 증인으로 신청해 ‘검찰이 측정한 DNA 결과지를 본 적 있냐’고 물으니 ‘해당 DNA 수치를 본 적이 없고, 보고서에 적힌 얘기(직접 접촉 관련 내용)도 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주장했다. B씨의 구강(입에서 목구멍에 이르는 빈 곳) 내용물, 구강 안 타액, 왼쪽 귀, 입술, 왼쪽 볼, 조끼·마스크 일부에서 타액 양성 반응이 나온 것만으로는 타액이 A씨 것인지 확인되지 않고, B씨 구강 안 타액에서 검출된 A씨의 DNA(Y염색체) 양만으로 A씨가 B씨 입에 혀를 넣었는지 여부까지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재판부는 “B씨의 손바닥과 손등에서 피고인의 DNA가 검출된 것은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고 주장하는 점에 비춰 특별히 유의미한 증거라고 보기 어렵다”며 “피고인은 지난해 11월 1일 B씨가 현행범으로 체포돼 유치장에 입감된 이후 조사 또는 병원 진료를 위해 수차례 출감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신체 접촉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B씨 신체나 의복에서 피고인의 DNA가 검출된 것이 ③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조사나 진료 과정에서 전이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A씨는 “아직 항소심과 상고심이 남아 안심할 수 없는데, 하루속히 현업에 복귀해 제대로 된 수사를 하고 싶다”며 “피해자뿐 아니라 피의자 주장도 충분히 검토해 나처럼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A씨가 제기한 파면 처분 취소 소송 첫 재판은 다음 달 열린다.
한편, 전주지검은 A씨 1심 판결에 대해 사실 오인 및 법리 오해를 이유로 항소했다. ▶주된 피해 내용에 대한 일관된 피해자 진술 ▶피해자가 진술한 부위(손·얼굴·옷의 가슴 부위·입술·구강 안)에서 피고인의 DNA가 다량 검출된 점 ▶피고인이 피해자 허리를 감싸는 행위 등을 목격한 타 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피고인의 행위를 따라하는 모습 등이 담긴 CCTV 영상과 해당 경찰관들의 증언 등 공소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충분하다는 판단에서다.
검찰 관계자는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진술의 신빙성을 낮다고 판단하고, 피해자 몸과 의류에서 검출된 DNA 증거나 관련 CCTV 영상만으로는 증명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며 “1심 판결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동기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이상 성범죄 피해자 진술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되고, 신뢰되는 방법에 의해 실시된 과학적 증거는 사실 인정을 함에 있어서 상당한 정도로 구속력을 가진다’는 판례에 반한다”고 반박했다. 이어 “항소심에서 피해자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실체적 진실에 부합하는 결론이 나올 수 있도록 공소 유지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A씨(54)가 지난 27일 휠체어에 탄 채 병원 내 쉼터에서 쉬고 있다. A씨는 "교도소에 면회 온 딸내미에게 '아빠 믿지?' 그랬더니 딸이 '아빠 믿어' 그러는데 눈물이 났다"고 했다. A씨 딸은 아버지 뒤를 이어 경찰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김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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