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화학의 눈으로 보는 미술, 재료와 질감에 담긴 의도와 아름다움[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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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미래의창
가끔 궁궐에 가면 처마 밑을 본다. 나무를 짜 맞춰 놓은 이음매 사이에서 빛나는 공교로움에 아득해지곤 하는데, 그림이나 사진에서 받는 느낌과는 결이 다르다. 실과 시간에 선생님 눈을 피해 대패질 장난을 쳐본 덕분에 그나마 느끼게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내 솜씨에 재료와 질감에서 뭔가를 느낄 리 없다고 경계하기도 한다.
미술을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이야기는 드물지 않다. 터너나 콘스타블의 풍경화에 자주 등장하는 붉고 탁한 하늘이나 불규칙한 구름 형상 등등이 탐보라 화산 분화 때 나온 화산재로 인해 변형된 대기의 광학 효과를 그대로 반영한다든가, '별이 빛나는 밤'처럼 형태를 일그러트려 놓은 고흐의 그림들을 분석해보면 대기 난류 패턴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지난 5월 촬영된 모습이다. 화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지은이는 이곳에서 열린 '예술과 과학' 세미나를 비롯해 다양한 과학 행사에서 연사로 활동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현상이 아니라 화가의 생각이 분석 당하기도 하는데, 달리의 '기억의 고집'이 시공간의 상대성을 담았다고도 한다. 물론 인상파 화가들이 당대의 시각이론에서 영감을 얻은 일은 틀림없어 보이고, 그런 지식이 작품을 읽어내고 분석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이들과 달리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은 25편의 에세이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과학과 미술을 이야기한다. 글쓴이는, 말하자면 ‘미술 재료 기호학’을 선보인다. 그는 작품에 사용되는 재료 속에는 한 편의 시가 담겨 있고, 재료가 다르면 상징하는 바가 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과학의 정신이 미술을 이끈다거나, 미술도 과학의 대상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재료과학과 화학이 미적 경험을 얼마나 심화시키는지 함께 느끼자는 것이다.
재료를 분석하기만 했다면 전공과목 교과서 같은 과학책이었겠지만 더 깊은 미적 경험으로 향하는 의도는 이 책을 아름다움에 대한 책으로 승화시킨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보인다는 말처럼, 알면 알수록 마음이 움직이는가 보다.

지난 4월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 주변에 벚꽂이 만개한 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거미 형상의 조형물은 이 미술관 소장품인 루이즈 부르주아의 '마망'이다. [연합뉴스]
상징은 눈에 보이지 않고, 느낌은 파일처럼 복사될 수 없느니만큼, 이 책의 에세이들은 사적이다. 그러면서도 재료와 화학반응 이야기가 군데군데 색깔이 다른 모자이크 조각처럼 자리한다. 루이즈 부르주아가 '마망'을 제작할 때 어떤 재료를 어떻게 가공해서 무슨 의미를 담았는지를 책에서 읽고 난 뒤, 작품 사진을 다시 찾아보면 불안하고 위태롭고 포근하고 감동적인 느낌이 동시에 소용돌이친다.
건축재료로 쓸 수 없는 부류의 콘크리트를 일부러 사용해서 예술적 표현을 담은 에두아르도 치이다의 조형물이나, 습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안료 하나만으로 그린 프란 에르베요의 그림에 담긴 의미를 추정하는 에세이를 읽고 나면 물리적 작품을 직접 보며 그 질감과 전시 환경에서 어우러져 나오는 느낌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진다. 재료와 화학을 이야기하는 이 책의 모자이크들이 아름다운지 아니면 번거로운지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정량적 화학식이나 분자식을 넣고 싶은 욕망은 극복한 점은 훌륭하다. 이 책의 화학 이야기를 거북해할 독자보다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괴로워할 청중이 훨씬 더 많을 듯하다.
때로는 미술가와 그의 작품이 상징하는 바가 미술가의 주관적 의도와 무관하게 읽혀지듯, 재료와 질감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지은이와 그의 믿음도 그러하다. 지은이는 화학에서 아름다움·진리·선 등 동경할 만한 가치를 발견했고, 과학에서 아름다움이 진실의 기준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들에 느끼는, 격렬하게 충만한 미적 경험은 때로는 종교적일 정도로 기쁘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런 사적인 기쁨이 과학이 추구하는 바가 되어도 좋은 것일까? 무방하다는 느낌과 경계해야 한다는 판단이 소용돌이친다. 그래도 화면과 사진으로만 접하는 아름다움이 넘치는 세상에 질료와 질감을 부각시킨 것은 신선하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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