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달콤한 환상과 씁쓸한 현실의 절묘한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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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머티리얼리스트'의 한 장면. 커플매니저 루시(다코타 존슨)과 완벽한 조건을 갖춘 남자 해리(페드로 파스칼'의 관계가 아슬아슬 이어진다. 사진 소니픽쳐스

뉴욕의 잘 나가는 커플 매니저 '루시'(다코타 존슨)가 남성 고객에게 이상형을 묻는다. 세상 물정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여성을 원한다는 남자. 그러나 대화 끝에 제시하는 조건이 구체적이다. "30대 여성은 안돼요". 그렇다면 여성 고객들은 어떤가. "나는 대단한 사람을 바라는 게 아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이던 여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키 180cm 이하는 안돼요. 연봉 2억 원 이하도 안 되고요". 루시는 웃으며 약속한다. "약속해요. 당신 인생의 사랑을 찾아드릴게요."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감독 연출#다코타 존슨, 페드로 파스칼 등 열연#결혼 조건 놓고 계산기 두드리는 현실#송 감독, 각본과 연출로 역량 다시 입증

영화 '머티리얼리스트'(8일 개봉)는 커플 매니저로 일하는 루시가 두 남자 사이에 고민하는 로맨스를 그린다. 루시 자신이 반려자를 찾기 위한 까다로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한 남자는 인생에 갑자기 나타난 완벽한 조건의 '유니콘남' 해리(페드로 파스칼), 또 다른 남자는 연극 무대를 전전하며 알바 인생을 사는 전 남자친구 존(크리스 에반스)이다. 스토리 윤곽만 보아도 뻔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한 셀린 송(37·한국명 송하영) 감독의 접근은 역시 달랐다.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2024)로 지난해 아카데미상 최우수 각본상 후보에 오르고, 전미 비평가협회 작품상 등을 휩쓴 주역답게 현실적이고 섬세한 접근으로 새로운 로맨스 영화를 완성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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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 개봉에 맞춰 지난해 2월 내한한 셀린 송 감독. 사진 CJ ENM

루시는 고객들에게 "사랑을 찾아주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 일이 쉬울 리 없다. '사랑의 시장'에서 상품의 가치를 매기는 방법은 별것 없다. 나이, 체중, 키, 소득이 숫자로 매겨진다. 이를테면 키 185cm의 남성의 시장 가치는 170cm 남성의 두 배다. 여기에 인종을 따지는 사람도 있고, 머리숱도 중요하다. 루시는 이런 고객들을 매일 상대하며 자신은 부자를 만나지 못하면 차라리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루시는 고객의 결혼식에서 뉴욕 최고의 싱글남 해리을 만난다. 신랑의 형인 그는 재력은 물론이고 훤칠한 키, 몸에 밴 매너까지 조건을 모두 갖췄다. 루시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그가 다가오는데 하필이면 그날 피로연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던 전 남자친구 존과 마주친다.

현실과 환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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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머티리얼리스트'의 한 장면. 커플매니저로 일하는 루시(다코타 존슨)은 부자인 남자를 못 만나면 평생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다. 사진 소니 픽쳐스

영화는 치밀한 각본. 로맨스 영화의 틀, 매력 넘치는 세 배우의 힘을 빌려 사랑과 돈이라는 주제를 날카롭고 솔직하게 파고들어 간다. 솔직히 아름다운 배우 다코다 존슨을 특별할 것 없는 싱글 여성처럼 연출해낸 것 자체가 환상이다. 시장에서 별로 내세울 것 없다는 루시에게 "나는 당신이 지닌 무형 자산, 잠재력에 끌리는 것"이라 속삭이는 해리는 또 어떤가. 하물며 돈 없는 전 남자친구 존도 외모는 빼어나다.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의 공식을 따른 듯한 이런 요소들을 통해 영화는 관객을 사로잡는다. 소극장 무대에 서는 존의 삶, 그와 행복했고 또 지긋지긋하기도 했던 루시의 과거가 보통 사람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남루한 현실을 일깨우면서.

또 캐릭터들의 화려한 언변으로 사랑과 결혼의 모순을 재치 있게 들춰낸다. 루시의 한 여성 고객은 결혼식 날 침대에 엎드려 마스카라가 다 번지도록 눈물을 흘리며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내가 결혼을…" "우리 집에 소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라며 현대 여성인 자신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승복했음을 한탄한다. "결혼은 '요양원 동지'나 '무덤 짝꿍'을 찾는 일" "데이트는 엄청난 노력과 리스크, 고통을 동반한다"는 등 연애와 사랑을 주제로 한 다양한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커플 매니저' 출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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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탈출해야 하는 인연인가. 영화 속 루시(다코타 존슨)과 존(크리스 에반스).

사실 이 영화엔 감독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다. 송 감독은 배급사 소니 픽처스를 통해 배포한 '디렉터의 편지'를 통해 "20대에 뉴욕에서 극작가로 지내며, 생활비에 보태고자 매칭 회사에서 6개월 정도 일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내 업무는 의뢰인들이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주는 일이었지만 이상형에 관해 물으면 의뢰인들은 수치화된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 "이때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사랑의 시장에서 스스로 상품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았다"는 그는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머티리얼리스트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영어 '머티리얼리스트(materialist)'는 우리 말로 '물질(만능)주의자'를 뜻한다. 모든 것이 시장 가치로 평가되는 시대에 감독은 영화를 통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한다. 다만, 이미 문화적으로 결혼이 다른 사회에 비해 경제적(물질주의적) 결합의 성격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이 얼마나 예리하고, 신선하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어쨌든 송 감독은 데뷔작에 이어 이번 영화를 통해 세계 무대에서 역량 받는 감독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게 됐다. 영국 매체 'BBC' 역시 "이 영화는 단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훨씬 더 독창적이고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격찬했다. 송 감독은 친근한 화법으로, 그러면서도 새롭고 개성 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달콤쌉싸름한 이야기를 빚어냈다. 그의 다음 영화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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