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의대 대신 공학의 길 택한 세 청년…"한국의 머스크 될래요" [AI시대, 이공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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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선택한다고 해도 같은 길을 택할 것 같아요.”

의대에 합격하고도 공대에 진학한 학생들이 이달 초 1학기 수업을 마치면서 밝힌 소감이다. 교사·친구들로부터 ‘제 정신이냐’는 말까지 들으며 선택한 길이지만, “수업을 들을수록 확신이 더 깊어졌다”고 말했다. 어렵고 낯설었지만, 재미있고 새로웠다.

중앙일보는 ‘자연계 최상위권=의대 진학’이란 입시 공식에서 벗어나 공학도의 길을 택한 허채량(포스텍 반도체공학과·2학년)씨, 권준혁(한국에너지공대·1학년)씨, 어재희(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1학년)씨를 각각 인터뷰했다.

주변 만류에 “의대 가면 더 후회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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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채량(포스텍 반도체공학과 2학년)씨가 지난 7월 서울 성수동에 있는 로봇 제작 업체 뉴로메카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며 AI로봇 관절 부품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지난해 2월 경북 포항의 동성고(일반고)를 졸업한 허씨는 지역 사립대 의예과와 포스텍에 모두 합격했다. 그는 “2024학년도 대입은 의대 증원 전에 치러져 의대 인기가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도 ‘왜 이런 기회를 왜 포기하느냐’고 반대하셨다”고 전했다.

허씨는 “물론 의대 합격이 꿈만 같았지만, 오랫동안 준비해온 공학자의 길을 순간의 유혹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2학년이 되어 본격적인 전공 수업에 들어간 그는 “이번 학기 반도체 소자 과목을 들었는데, 트랜지스터 하나의 동작 원리를 한 학기 동안 깊이 있게 다뤄 정말 재미있었다”며 “1학년 때 배운 기초 과목들이 전공과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깨닫고 뿌듯했다”고 밝혔다. 그는 “어느 쪽을 택해도 아쉬움은 있었겠지만, 의대를 갔으면 지금보다 더 후회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사보다 공학자가 더 좋은 세상 만들 것”

허씨와 달리 권씨의 원래 꿈은 의사였다. 서울 삼육고 졸업 직후 지역 국립대에 입학했지만, 반수 끝에 지역 국립대 의대와 에너지공대에 모두 합격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땐 (성적이 좋은 편이라) 자연스럽게 의대를 목표로 했고, 의사가 되면 소외된 지역의 발전에 도움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의정 갈등을 지켜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권씨는 “의사가 된다고 해서 좋은 사회를 만드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의사보다 공학자가 되는 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고 했다.

권씨의 부모님은 아들이 의대에 진학하지 않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는 “처음에 부모님은 물론 주변 모두가 의대를 권하며 공대 선택을 말렸기 때문에 고민이 깊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권씨는 “지금은 부모님도 아쉬워하지 않고 ‘너랑 맞는 길인 것 같다’고 하신다”고 했다.

“수능 만점인데 진짜 공대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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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희(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1학년)씨가 지난 7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며 공과대학 내 전자회로 실험 실습실에서 계측기기 위에 손을 얹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서울 도봉구 선덕고(자사고)를 졸업한 어씨는 지난해 대입 수능 만점을 얻은 수험생 11명 중 한 명이다. 그는 “고1 때부터 공학도를 꿈꿨다. 학교에서 제공한 빅데이터·자율주행 등 다양한 공학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레 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어씨는 “당연히 (목표대로) 공대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수능 만점을 받은 후엔 ‘진짜 의대 안 가고 공대 갈 거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자연계 최상위권 학생 상당수가 서울대 공대나 자연대, KAIST으로 진학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수능 만점자가 의대 대신 공대에 가는 게 언론의 주목을 받을 만큼 급격히 줄었다.

그는 대형 병원을 보유한 서울 소재 의대에 합격했지만, “공부 체질이라 연구자가 맞다”며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어씨는 “강의실에 앉아 있는데 모르는 학생이 먼저 알고 말을 걸더라. 공대에서 다른 수능 만점자를 만나 서로 신기해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어씨와 함께 만점을 받은 서장협(서울 광남고 졸업)씨도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에 진학했다.

어씨는 첫 학기를 마친 소회에 대해 “본격적인 전공 수업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대학 수업은 고등학교 때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는 적은 개념을 깊이 익히는 데 집중했다면, 대학에서는 방대한 개념을 빠르게 이해하고 응용하는 방식”이라며 “학습의 목적 자체가 다르다는 점을 뚜렷이 느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공학이 매번 새롭고 도전적이어서 좋다고 했다. 어씨는 “무료한 일상을 싫어하는 편인데, 공학은 늘 새로운 지식을 마주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즐겁다”며 “역시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의대가 아닌 공대를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머스크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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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혁(한국에너지공대 1학년)씨가 지난 7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며 글로브박스(산소나 습기를 차단한 청정 환경) 실험 실습을 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정필 프리랜서

의대 대신 공대를 택한 데엔 “기술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포부”가 작용했다고 했다. 전공 선택 이유를 묻자 권씨는 “에너지 산업은 지역에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고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신산업 분야에서 딥테크 창업에 도전하고 싶다. ‘한국의 일론 머스크’로 불릴 정도로 성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권씨는 최근 신재생에너지 기자단 활동을 하며 산업 박람회에 참석하고, 창업 기업 대표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창업에 대한 안목을 넓히기 위해서다. 방학 중에는 기후·에너지 분야 기술을 주제로 한 아이디어 경진대회를 직접 기획해 주최할 계획이다. 그는 “참가자가 아니라 주최자로 나서 경진대회를 열어보려 한다”며 “기자단 활동을 하며 기후위기 같은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도전하는 창업가·교수·학생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한데 모으는 일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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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희(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1학년)씨가 지난 7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며 공과대학 내 도서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허씨는 기술과 공학을 통해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전문가가 목표다. 그는 고교 시절 온실에 작은 생태계를 조성해 생명체를 키우는 활동을 했고, 직접 태양전지를 만들면서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지 연구했다.

허씨는 “지금도 챗GPT 등의 대규모 연산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데, 이를 해결하는 지속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어씨는 “아직 신입생이라 학과에서 다양한 지식을 접하며 진로를 탐색하고 있다”며 “졸업 후 유학을 통해 더 넓은 세상에서 공학 지식을 깊이있게 쌓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달에는 일본 교토에서 열린 국제 반도체 학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허씨는 “대학원생이나 교수, 기업 연구자들이 주로 발표하는 자리지만, 학부생에게도 참석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며 “세계적인 반도체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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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채량(포스텍 반도체공학과 2학년)씨가 클린룸(청정 실험실)에서 반도체 칩에 얇은 금속막을 입히는 기계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본인 제공

“공대 출신 성공 사례 많이 나와야”

세 공학도는 자신의 선택을 특별하게 여기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허씨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인재가 몰리는 건 좋은 일이지만, 돈과 안정성만 보고 공학에 관심 있는 사람까지 빠져나가는 건 아쉽다”고 했다. 이어 “의대는 군의관으로 전공을 살리며 복무할 수 있지만 공대생들에게는 이런 병역 연계 제도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점도 아쉽다”며 “공학 분야에선 국내 기업 간 이직 제한 등으로 연봉 상승이 쉽지 않아 선배 중 해외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고도 했다.

권씨는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부족해 다들 안정성만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며 “공대 출신의 다양한 성공 사례가 더 많이 나와야 후배들도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공부 계속 할 수 있는 게 공학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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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혁(한국에너지공대 1학년)씨가 지난 7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며 실험 실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정필 프리랜서

공학도를 꿈꾸는 예비 후배들에게 이들은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먼저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권씨는 “물리나 화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수업 외에 따로 찾지 않는다면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닐 수 있다”며 “정말 그 분야를 좋아하는 지 생각해보고, 맞다면 진심을 다해봐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허씨는 ‘학교생활기록부 다시 읽기’를 추천했다. 그는 “내가 어떤 탐구 활동을 할 때 가장 흥미를 느꼈는 지 되짚어보니 의대와 공대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할지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어씨는 “공학에 관심이 있어 공대를 선택했더라도 우수한 학점이나 연구 성과가 저절로 따라오는 건 아닐 것”이라면서 “하지만 내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계속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공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고, 그게 공학자가 가진 힘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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