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쿠바서 쌀 팔아 독립 도운 증조부…나도 한국에 도움될 것"[독립의 얼 잇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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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말, 황성신문의 ‘묵서가(墨西哥·멕시코를 뜻하는 한자어) 농부 모집’ 광고를 본 1000여 명의 한국인이 멕시코행 배에 몸을 실었다. 당시 두 살배기 임천택(1903~1985)도 홀어머니의 등에 업혀 1905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다. ‘4년 계약, 높은 임금’이라는 광고에 이끌렸지만 그들 앞에는 또다시 끝을 알 수 없는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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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임천택 지사. 사진 한남대

임천택은 18살이 되는 해까지 멕시코 에네켄(선인장 일종인 용설란과의 식물) 농장의 모진 환경에서 성장했다. 멕시코의 경제 불안이 계속되자 1921년 임천택은 한인 300여 명과 함께 쿠바로 이주했다. 그가 정착한 마탄사스 지역은 이후 쿠바 한인 사회의 기반이 됐고, 그는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생애를 바쳤다.

독립지사의 후예, 쿠바 출신 유학생 1호 돼

임천택 지사가 쿠바에 자리 잡은 지 90여 년 뒤인 2013년, 그의 증손녀 아자리아 임(당시 20)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쿠바 출신 유학생 1호였다. 지금은 영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임씨는 12일 중앙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나는 쿠바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에선 항상 조국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라고 배우며 자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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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리아 임이 지난 2013년 2월 한남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태극기를 들고 선배들의 환영을 받는 모습. 사진 한남대

임씨가 2013년 한남대에 입학하기로 결정한 것도 증조부의 조국 사랑에 영향을 받았다. 임씨는 “증조부께선 한국 문화에 애정을 잃지 않으셨다고 했다”며 “특히 자식은 물론 주변 한인들도 한국어를 배우고 보존하기를 바랐다”고 전했다. 또 “생일잔치를 할 땐 한복을 입었고, 항상 김치를 먹었다”며 “쿠바 집에 오는 손님에게 한국 그림과 책을 소개하는 것이 큰 자랑이었다”고 했다.

청년 교육, 독립운동 자금 모금 

임 지사는 쿠바의 한인 2세를 위한 국어 교육에 특히 힘을 쏟았다. 1925년 쿠바 최초의 한인 학교인 민성국어학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했고, 1930년에는 재정 문제로 운영을 중단했던 진성국어학교를 재건하기도 했다. 또 야학교인 청년학원을 설립하는 등 청년 교육으로 조국 독립에 기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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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리아 임이 지난 2013년 한국 유학 시절 증조부 고(故) 임천택 지사의 사진을 소개하는 모습. 사진 한남대

1920년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정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임 지사는 쿠바 한인들과 함께 ‘한 사람당 쌀 한 숟가락씩’을 모아 판 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렵게 모금한 246달러는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있는 중국 은행을 통해 임시정부로 부쳤다. 당시 한인 임금이 일주일에 2~3달러 수준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임 지사의 이런 행적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나와 있다. 김구 선생은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1만여명의 동포는 비록 대다수가 노동자였지만 애국심은 강렬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정부는 1997년 임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2004년 유해를 봉환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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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현지시간) 영국 노팅엄에서 아자리아 임(32)이 중앙일보와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성빈 기자

아자리아 임은 “증조부의 이데올로기(이념)는 ‘돕고 살라’는 것이었다”며 “조국뿐만 아니라 주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학 졸업 후 2017년 말부터는 영국에서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임씨는 “나도 증조부의 헌신 정신을 이어받아 도움을 실천하며 살고자 하고 있다”며 “내가 버는 돈이 아무리 적더라도, 만약 한 달에 100파운드(약 19만원)를 번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나누고 있다”고 했다. 그는 최근 암 치료 연구 관련 모금 행사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비수교국이었지만 임 지사 공적 인정돼 유학 

증조부의 나라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은 컸지만, 한국 땅을 밟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유학을 추진했을 당시 쿠바는 한국과의 수교가 없는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임씨는 “쿠바에선 한국으로의 유학 비자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며 “각종 서류 작업을 해서 한국 대사관이 있는 멕시코로 보내 처리해야 했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지금은 K팝·K드라마로 쿠바에도 한국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고도 했다. 다행히 증조부의 공적을 인정한 양국 정부와 한남대의 도움으로 무사히 입학할 수 있었다.

임씨는 “부모님이 나를 보러 한국에 오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며 “방학 때 내가 쿠바에 가는 것도 어려웠다”고 했다. 임씨의 아버지인 세르히오 임은 딸이 대학을 졸업한 뒤인 2017년에야 정부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임씨는 아버지와 함께 증조부가 안장된 대전현충원부터 찾았다. 임씨는 “한국이 할아버지를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감동이었다”며 “한국인이 애국심을 표현하는 모습이 특히 자랑스러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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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열린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한 아자리아 임(32)의 가족. 사진 아자리아 임

"증조부 나라 위해 노력"…한국 국적 취득한 증손자 

임씨는 또 최근 아바나에서 열린 광복 80주년 경축식 행사에 참석한 가족들의 사진을 보이며 “한국이 독립운동가와 후손을 이렇게 기념해주고 있다는 점도 감사하다”고 전했다. 임씨는 “증조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머나먼 타국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임씨는 “지금도 사촌, 친척들이 증조부의 조국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며 “나 이후로도 한국에서 공부한 동생이 많다”고 했다. 모두 임 지사가 낳은 9남매의 손주들이다. 충남대 대학원에서 인공지능(AI) 분야 석사 과정을 밟은 또 다른 증손자 엥 림 펜잔 안토니오는 지난해 한국 국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안토니오는 “나라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아자리아 임은 2013년 국내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한국 문화 전도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임씨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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