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조선인 차별말라" 단식 동맹휴학…17세 日소년이 이끌었다[잊힌 독립영웅을 찾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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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 광복은 수많은 순국 선열의 희생을 통해 현실이 됐다. 이 중에는 백범 김구나 도마 안중근처럼 널리 추앙받지는 못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 없이 일제에 저항해온 숨겨진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기록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중앙일보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이 찾아낸 ‘잊힌 독립 영웅’의 흔적을 조명했다. 지난 2018년 발족한 TF팀이 지금까지 발굴한 독립운동가는 모두 3595명. 존재조차 몰랐던 영웅을 함께 기억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빛을 찾는 길을 따라가 본다.

“해주고보학생이 농성하고 절식까지 단행한 맹휴(동맹휴학) 사건의 주모자 19명은 2대의 자동차로 검사국으로 송치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학부형이 모여 해주지법 마당은 그야말로 눈물 엉킨 광경을 이루었다. 해주서에서 취조를 받던 학생은 59명…이번 맹휴 사건을 총지휘한 학생은 새로 전학해온 일본인 학생 야마자키 나카에이(山崎仲英)다.”

1931년 10월26일 일본인 교사의 민족차별에 반발, 황해도 해주고등보통학교에서 벌어진 이른바 ‘해고 맹휴’ 사건을 다룬 당시의 언론 보도다. 야마자키는 불과 17세의 학생으로, 당시 신문들은 일본인 학생이 맹휴를 주도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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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해주고등보통학교에서 벌어진 이례적 '단식 맹휴(동맹휴학)'를 다룬 동아일보 보도(1931년 12월13일자 3면). 17세 일본인 학생 야마자키 나카에이가 이를 주도했으며, 단식 맹휴라는 아이디어도 고안했다. 파란 표시가 야마자키의 이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일제 시대 때 맹휴는 학교의 부당한 처사와 민족적 불의에 저항하기 위한 학생들의 집단행동으로, 가장 적극적 형태의 학생운동으로 평가받았다. 일제의 탄압 하에서도 맹휴가 가능했던 건 어린 학생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일본 학생이 주도했다는 건 항일독립운동이 국적을 떠나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호소하는 당위성을 지닌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이 야먀자키를 비롯, 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 346명을 찾아낸 게 방증이다. 이 가운데 일본인은 26명이다.

야마자키가 주도한 맹휴는 단식까지 병행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최초의 단식맹휴로 일세를 놀랜(세상을 놀래킨) 해고사건’(1931년 12월13일 보도)이라는 제하의 기사로 공판 과정에서 나온 학생들의 진술 등을 상세히 다뤘다.

학생 조진성은 맹휴의 직접적 발단이 된 건 학교가 학생들을 위한 교우회 기본금으로 피아노를 산 데다 교사만 쓸 수 있을 뿐 학생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한 일이라고 진술했다. 이는 당시 상습적으로 이뤄지던 일본인 교사들의 조선인 학생 멸시 행태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출신으로 맹휴 약 5개월 전 전학온 야마자키는 재판장의 심문에 “선생들의 학생에 대한 태도가 일본과는 아주 딴판으로 불친절하고, 따라서 학생의 인격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일이 많음을 봤다”고 답했다. 피아노 사건에 대해서도 “불평을 품고 일찍이 선생들에게 질문한 바도 있었다”고 했다.

단식 맹휴라는 아이디어도 자신이 고안했다고 시인했다. 그는 “‘힌트’는 신문지상으로 (보도된)동경상과대학이 취한 방법을 본뜬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맹휴로 체포한 학생 54명 중 42명은 불기소하고, 야마자키를 포함해 맹휴를 주도한 학생은 폭력행위 위반, 건조물 파괴 등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은 맹휴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실은 시인하면서도 학교 시설 등 건조물을 파괴했다는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검사는 학생인 이들에 최고 8개월, 최하 6개월 징역을 구형했다.

해주지법은 1931년 12월12일 야마자키에 징역 8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가장 중형을 선고받은 학생 중 하나였는데, 그가 일본인인 데다 미성년자임을 고려하면 이례적 조치였다.

맹휴부터 선고까지는 채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언론도 “피고 12명에 대한 심리를 일사천리로 진행했다”고 표현했는데, 일제가 일본인 학생까지 가담한 초유의 단식 맹휴 사건이 일으킬 사회적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야마자키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결국 그대로 형은 확정됐다. 이런 과정에서 구속 기간이 길어지며 그는 반 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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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비밀결사 항일 조직을 다룬 '대구학생의 적성단 피의자성명'이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보도(1928년 12월11일자 3면). 일본인 시바타 겐스케가 대구에 온 이후 학생들의 사상운동이 발원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파란 표시가 시바타의 이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비밀결사조직까지 만들어 독립운동을 도운 일본인 시바타 겐스케(柴田建助, 1887년생)도 있다. 그는 1927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 대구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신우동맹, 역우동맹, 적우동맹 등의 비밀결사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도왔다. 조직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강좌를 열고 토론을 이어가며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북 경찰부 고등과에서 ‘대구학생적성단’ 사건으로 시바타를 포함해 37명을 검거했다.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시바타는 “공산주의에 공명해 조선독립을 희망하여…조선 민족의 해방 운동을 옹호하는 불온한 취지의 기사를 게재한 신문 탐독을 권유하며 실행을 선동”했다.

당시 언론은 이를 경상북도 최초의 학생비밀결사 사건으로 부각하며 보도를 쏟아냈다. “조선 최초의 학생적화결사…종래의 결사운동 중 중학생을 중심으로 실로 조선 최초의 대공판”(중외일보 1929년 9월 11일 보도) 등으로도 표현했다. 가담자만 100~200명으로 추산됐다.

다수 언론은 시바타를 비밀결사조직의 핵심으로 지목했다. 움직임이 “2년 전 시바타가 대구에 발을 들인 뒤부터 발원”했다거나 그가 “대구 중심 학생비밀 결사의 이면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검사국을 거치지도 않고 경찰이 체포한 주모자들을 형무소에 직접 수용할 정도로 사안을 중대하게 인식했다고 한다. “주모 시바타 이하 26명은 어마어마한 경계 중에 전부 검사국으로 송치했고…수범(首犯) 시바타는 다른 피의자들과 격리시키기 위해 최후까지 유치장에 두었다가 솜이불로 얼굴을 덮어 자동차에 얹어 즉시 대구형무소로 수용했다”고도 돼 있다. (조선일보 1928년 12월14일 보도)

시바타는 1930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개월(미결구류 일수 200일 산입)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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