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다른 사람들 메모가 기다려진다"…MZ들 푹 빠진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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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서점 피프티북스에 놓인 요시타케 신스케의 그림책 『더우면 벗으면 되지』. 이곳에 놓인 50권의 책엔 인문, 과학서적을 포함해 시, 소설, 에세이, 그림책까지 다양한 장르가 포함됐다. 최혜리 기자

책장 끝에 인덱스 테이프가 붙어있고, 문장에는 여러 번 밑줄이 그어져 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서점 피프티북스에 진열된 책들은 모두 이런 독서 흔적이 남아있다. 헌 책을 파는 것이 아니다. 한 책을 여러 명이 돌려 읽는 ‘교환독서’의 기록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지난 12일 방문한 피프티북스에선 요시타케 신스케의 그림책 『더우면 벗으면 되지』(주니어김영사)에 붙은 인덱스 테이프들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의 불행을 바란다면/파도가 밀려오는 물가에다 쓰면 되지”라고 적혀있는 장에 “‘이거다’ 싶은 최고의 방법”, “나도 해봐야지”, “아주 귀여운 생각이다! 부산 가서 해야지” 등 공감을 이루는 문장이 댓글처럼 늘어섰다.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런 교환독서가 유행하고 있다. SNS에서 시작된 문화가 오프라인으로 퍼져나가며 교환독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무인서점에 방문하는 이들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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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방문한 서울 마포구 무인서점 '피프티북스'.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방문객들이 필사나 메시지를 남긴 메모가 빼곡히 차 있다. 최혜리 기자

교환독서는 ‘여러 사람이 같은 글이나 책을 돌려가며 읽는다’는 의미, 윤독(輪讀)이란 용어로 불려 온 독서법이다. 최근의 교환독서는 그보다 다양하게 해석된다. 독서흔적을 남긴 책들을 교환하거나, 원래 의미처럼 한 권의 책을 돌려 읽으며 감상평을 쌓아가기도 한다. SNS 속 ‘교환독서 후기’엔 “상대방의 메모가 기다려진다”, “생각이 확장되는 기분”이라는 평가가 다수다.

이지혜 문화평론가는 “교환독서는 실천이 간편하며, 감정 공유가 직관적”이라며 “독서모임을 하고, 굿즈를 사거나 SNS에 기록을 올리는 등 책을 통해 관계를 맺고 감정을 확장하는 최근 독서문화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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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현대문학은 정해연 작가의 소설『매듭의 끈』의 서평단을 교환독서의 형태로 모집했다. 사진 현대문학 인스타그램 캡처

출판사도 책을 알리는 수단으로써 ‘교환독서 프로그램’을 활용 중이다. 창비는 지난 5월 북클럽 회원을 대상으로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 교환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현대문학은 지난 7월 정해연 작가의 소설 『매듭의 끈』으로 교환독서 서평단을 열고, 지난 5일 김혜정 작가의 소설 『돌아온 아이들』을 통해선 교환독서할 온라인 상대를 매칭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교환독서 방식은 다양하다. 현대문학 SNS에 따르면 실제 친구와 함께 신청하여 오프라인으로 책을 나눠 읽는 경우도 있었고, 신청자 간 만나기 어려운 경우 책 사진을 찍어 태블릿으로 메모를 남긴 후 그 이미지를 주고받는 방식으로도 진행됐다.

최근엔 작가와 독자가 직접 책을 교환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이다 작가는 지난달 31일 자신의 책 『도시관찰일기』(반비)에 독자들의 메모를 받고, 직접 답하는 참여형 이벤트를 열었다. 독자가 메모를 적은 책을 출판사로 보내면, 작가가 메모에 답을 남기고 독자에게 다시 책을 발송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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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평 공간인 피프티북스엔 최대 5명까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져있다. 작업실 혹은 독서모임 공간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최혜리 기자

하나의 책장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교환독서를 즐길 수 있는 ‘무인(無人)’ 서점에 방문하는 경우도 생겼다. 무인서점은 최근 1~2년 사이에 늘고있는 서점의 형태로, 최소 1명에서 최대 20~30명까지 수용 가능한 공간을 대관해 특정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서점이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서적은 새 책으로 구매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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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들어서면 나의 심적 상황에 맞게 고를 수 있는 ‘마음 카드’ 8장이 보이고, 각각의 카드마다 추천도서가 장르별로 구분되어 적혀있다. 한쪽 벽면을 채운 방문객들의 메모와 책 속 독서 흔적들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펜을 들게 된다. 이곳에서 생겨난 교환독서 모임도 있다. 최혜리 기자

지난해 11월 개업한 무인서점 피프티북스는 4평 남짓한 공간을 대여하고, 그 시간 동안 대표가 선별한 5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인문, 소설, 시, 에세이부터 그림책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1인 기준으로 2시간 동안 서점을 빌리는 비용이 2만5000원. 피프티북스의 박태희 대표는 “대부분의 고객은 20·30대로, 혼자 오는 사람도 많다”고 소개했다. 이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작가 혹은 다른 독자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독 문화를 만들어가는 이유”라고 전했다.

무인서점인 만큼 일반 서점에서 보기 어려운 독립출판물만 취급하거나 시, 소설 등 특정 장르만 다루기도 하고, 24시간 영업하는 경우도 있다. 2020년 문을 연 서울 영등포구의 ‘새고서림’은 공간 대여 형식은 아니지만 24시간 운영하는 무인서점이고, 2022년 문을 연 서울 관악구의 ‘회전문서재’는 30분 단위로 서점을 빌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참여형 지도인 ‘함께 만드는 동네서점 지도’에 따르면 현재 운영 중인 무인서점은 전국에 약 20개 정도로, 이중 절반이 2023년 이후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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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시 행궁동에 위치한 무인 시집서점 '시요'. 시요에서 직접 여는 윤독회는 5명에서 최대 10명 정도의 인원이 모여 하나의 책을 읽으며 감상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진 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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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시 행궁동에 위치한 무인 시집서점 '시요'. 작은 방, 큰 방으로 나뉘어진 공간을 1시간 단위로 대여할 수 있고, 비치되어 있는 시집은 책방 주인인 김고요 시인이 큐레이팅했다. 사진 시요

2023년 문을 연 경기 수원시의 무인 시집서점 ‘시요’의 대표인 김고요 시인은 “원래 유인(有人)서점이었는데,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시집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무인서점으로 바꾸고, 교환독서를 할 수 있도록 책을 빼두니 방문객이 늘고 재방문수도 증가했다”고 말했다.

특히 시 같은 장르는 타인의 후기와 함께 읽으면 의미가 쉽게 전달되는 경우도 있어 교환독서를 통해 진입장벽을 낮추기도 한다. 김 시인은 서점 차원에서 낭독을 통해 시집 한권을 돌려 읽는 윤독회를 열고 있다.

이지혜 평론가는 “교환독서가 무인서점이라는 공간의 특성과 결합해 새로운 독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며 “개인 공간을 중시하면서도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하는 요즘 젊은 세대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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