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현대家 사모님이 진짜 회장님 됐다…‘정주영 며느리’ 김혜영 한국브리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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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한국브리지협회 김혜영 회장이 브리지에서 쓰이는 카드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현대가 며느리로 40년을 살아온 김 회장은 올해부터 한국브리지협회 수장을 맡아 전국을 분주히 누비고 있다. 우상조 기자

1982년 12월 20일, 중매결혼을 통해 대한민국 일류 재벌가의 며느리가 됐다. 시댁은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현대그룹. 그 후의 삶은 대중에게 알려진 대로다. 새벽 4시 시부모님이 사시는 청운동 큰집으로 나서 일가 며느리들과 함께 아침밥을 차렸다. 그렇게 대식구의 출근길을 책임진 뒤에는 자녀들을 돌보고 취미생활을 즐기며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이른바 ‘현대가 며느리’로서의 삶. 조용하면서도 화려한 지난 40년을 살아온 회장 사모님이 진짜 회장님이 됐다. 한국브리지협회 김혜영(65) 회장. 2023년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브리지 종목의 국가대표로 출전해 화제를 모았던 김 회장이 올해부터 정식 수장을 맡으면서 다시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며느리, 정몽윤(70) 현대해상 회장의 아내에서 스포츠 단체장으로 변신한 김 회장을 최근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김 회장은 “손자손녀를 둔 할머니가 갑자기 회장님이 됐다.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동안 이 ‘끼’를 어떻게 참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닮았다’며 놀라곤 한다. 이제는 정말 시아버님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느낌이 든다”며 환하게 웃었다.

브리지는 2대2로 팀을 나눠 52장의 플레잉 카드로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이는 전략 종목이다. 경매와 입찰 등의 경제적 요소가 들어있고, 3시간여 동안 선수들의 패를 살펴야 해서 고도의 마인드 스포츠로 불린다. 유렵에선 18세기를 전후해 귀족 사교 모임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19세기를 거치면서 세계적 저변을 갖췄다. 특히 워렌 버핏(95)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과 빌 게이츠(70·이상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즐기는 종목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적 인지도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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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한국브리지협회 김혜영 회장(왼쪽)과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 1985년 정 회장의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경영대학원 석사 졸업식 때 사진이다.

김 회장과 브리지의 첫 만남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겨울 스키를 타다가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다. 그 좋아하던 스키와 골프 모두 즐길 수 없는 신세. 이후 몇 달을 무료하게 보내자 가까운 친구가 브리지라는 종목을 권유했다.

김 회장은 “그때만 하더라도 브리지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반신반의하면서 백화점 문화센터 수업을 들었다”면서 “그런데 처음 카드를 잡자마자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브리지는 모두가 공정하게 출발해 머리를 맞대고 두뇌 싸움을 하는 종목이다. 또, 경기 중에는 소리를 낼 수 없고, 동작도 금지돼 오로지 카드로만 팀원과 대화해야 한다.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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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한국브리지협회장. 우상조 기자

이후 각종 국내대회에서 동호인으로 활동하던 김 회장은 2015년부터 한국브리지협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행정 업무를 시작했다. 현대가 인맥은 물론 주변 지인을 총동원해 협찬사를 구하고 대회 장소를 섭외했다. 현재 브리지의 다수 대회가 반얀트리와 블룸비스타(이상 현대그룹), 오크밸리(현대산업개발), 현대백화점 등지에서 열리는 건 김 회장의 발품 덕분이다.

故 김진형 부국석면 회장의 딸로 태어난 김 회장은 1982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7남인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과 결혼했다. 한국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대그룹은 며느리들의 혹독한 시집살이로도 유명하다. 김 회장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김 회장은 “며느리들끼리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꼭두새벽부터 아침을 차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그대로다. 시아버님께서 편찮아지시기 전까지는 매일 비슷한 삶을 반복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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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브리지협회 김혜영 회장의 경기 장면. 사진 한국브리지협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인생도 조금은 변하는 법. 김 회장에게 찾아온 전환점은 2년 전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이었다. 김 회장은 “운 좋게 국가대표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부담은 됐지만, 브리지를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항저우행 비행기를 탔다”면서 “말로만 듣던 태극마크의 무게감을 처음 느껴봤다. 그때 브리지의 비공식 홍보대사로서 더욱 열심히 뛰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지난해 12월 회장을 맡아달라는 추천을 받아 출마를 결심해 제16대 회장이 됐다”고 했다.

브리지의 세계적 인지도와 달리 한국에선 그 입지가 아직 탄탄하지 않다. 그래도 최근 들어선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겸 시니어 취미 스포츠로 알려지면서 조금씩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김 회장은 “아직 한국에선 브리지 인지도가 높지 않다. 저변도 넓혀야 하고, 대한체육회 정식 회원단체 가입도 과제로 남아있다”면서 “남편은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닮았다’며 내심 좋아하는 눈치다. 아이들도 ‘그동안 이 끼를 어떻게 숨기고 사셨느냐’며 응원해준다. 임기인 2028년까지 내게 주어진 숙제를 해결해가면서 브리지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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