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욕먹어도 유능한 보수 실종…그 자리 '尹어게인'이 꿰찼다 [위기…
-
3회 연결
본문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입장하는 가운데 배경천(백드롭)에 '국민을 위한 국민 위한 변화·쇄신·포용·통합'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뉴스1
여야가 ‘3%룰’을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에 합의한 지난달 2일 국민의힘은 크게 술렁였다. 한 초선 의원은 “여당이 3%룰을 양보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라고 어리둥절해 했고, 성일종 의원은 “국가 경제에 치명적인 해악”이라고 반대했다. 경제 8단체는 “투기 세력 등의 감사위원 선임 가능성이 커졌다”고 우려했다.
당시 최대 쟁점은 3%룰 확대 적용 여부였다. 사내이사뿐 아니라 사외이사인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도 최대 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합산해 3%를 초과하는 지분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하자는 게 민주당 주장이었다. 반면 야당과 재계는 국내 상장사가 외국 투기 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노출된다며 반대했다. 이에 부담을 느낀 민주당 원내지도부는 3%룰 확대 적용을 양보할 수 있다는 내부 방침까지 정했다고 알려졌으나, 협상 결과는 의외였다. 강하게 저항할 줄 알았던 국민의힘이 덜컥 합의했기 때문이다.
당시 혼선에 대해 협상에 관여했던 국민의힘 관계자는 “민주당이 ‘뛰어내릴래, 맞아 죽을래’ 하길래 번개탄 마시자는 심정으로 협상했다”며 “107석 야당인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나. 경제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울며 겨자 먹기로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3%룰을 내줬지만,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는 막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선 “의석수를 탓할 게 아니라 원칙과 전략이 사라진 당 상황을 탓해야 한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수도권 의원은 “민주당에 제시할 플랜B, 플랜C까지 미리 마련해 협상하고, 안 되면 여론전이라도 세게 해야 했는데 민주당 페이스에 계속 끌려다녔다”고 지적했고, 영남 지역 의원은 “결국 기업 활동의 자유라는 보수의 가치를 지키지 못했다”고 했다.

4월 1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의과대학 증원을 비롯한 의료 개혁과 관련한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 시절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논란 때도 국민의힘은 우왕좌왕했다. 지난해 2월 윤 전 대통령이 처음 증원을 꺼냈을 때만 해도, 여론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협상 영역’으로 여겨졌던 2000명 증원을 고수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특히 지난해 4월 총선 직전 윤 전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2000명 증원’을 강한 톤으로 거듭 강조하자 국민의힘에선 “공포스럽다”(3선 의원)는 우려마저 나왔다. 이에 더해 의정 갈등 장기화로 ‘응급실 뺑뺑이’ 등 의료 대란이 터지자 당내 위기감은 더 커졌다. 충청 지역 의원은 “당시 지역구에선 곡소리가 터졌고, 내 멘탈(정신)도 터졌다”고 했다.
그해 8월 한동훈 전 대표가 2026학년도 증원 유예안을 용산 측에 꺼냈지만, 이는 사실상 거부당했다. 윤 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던 한 전 대표 대신 한 중진 의원이 총대를 메고 윤 전 대통령에게 증원 규모 조정을 완곡하게 건의했지만, 이 또한 무위에 그쳤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야권 관계자는 “그 중진 의원은 당시 ‘씨알도 먹히지 않더라’며 혀를 내둘렀다”며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쉬쉬하는 당 분위기는 더 굳어졌다”고 전했다.
한 비례대표 의원은 “나도 왜 1700명이 아닌 하필 2000명이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산 관계자에게 하소연해도 ‘VIP(대통령) 뜻이다’, ‘의료계에 밀리면 안 된다’와 같은 답만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결국 우리 당은 국민에게 왜 2000명이어야 하는지 전혀 설득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줄이자고 나서지도 못했다”고 했다. 당시 의료계와 대화에 나섰던 야권 인사도 “당이 윤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서 전혀 완충 역할을 못 했고, 보수에 호의적이던 의료계만 등을 돌렸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상법 개정안과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일련의 혼란은 당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나 정책, 그리고 이를 대중에게 어필할 전략이 사라진 국민의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실제 당내에선 “나도 우리 당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나 정책이 뭔지 모르겠다. 국민은 오죽하겠나”(영남 의원)라는 말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힘은 ‘반(反)이재명’에 올인해왔다. 부산 지역 의원은 “이재명만 때려도 최소 40%는 가져가는, 간편한 정치 구도가 수년간 이어졌고 우리 당의 체질은 약화했다”며 “더 큰 문제는 이런 빈틈을 부정선거 음모론이나 ‘윤 어게인(Yoon again)’ 같은 구호들이 자꾸 파고든다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당 재건을 위해 새로운 어젠다와 정책을 발굴하는 건 어렵지만 ‘부정선거로 우리가 졌다’라거나 ‘윤 대통령 다시 데려오라’고 외치기는 쉽다”며 “문제는 이런 구호가 국민의힘 한복판에서 울린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사 강사 출신 전한길씨가 8일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6차 전당대회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에서 ‘배신자'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이러한 국민의힘의 최근 모습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이준한 교수는 “한나라당의 소장파들은 2010년 10월 지방선거에서 패배하자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747 공약(7%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 폐기, 인적 쇄신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이는 과학적 분석과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성장 담론을 꼬집은 냉철한 내부 지적이었다”며 “최근 국민의힘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정치권엔 “욕먹어도 유능한 보수”라는 말이 통용되곤 했다. 도덕적 논란이 있는 정부여도 경제 성장과 국가 안보 등에선 상대적 강점이 있다고 여겨지던 때에 존재하던 말이다. 하지만 최근 그런 말이 쏙 들어갔다.
국민의힘은 2022년 대선 과정에서 ‘공정’ 가치를 내세우며 가까스로 정권 교체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때부터 딱히 새로 발굴한 어젠다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 대선 기간 ‘이재명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와 결이 다른 실용주의와 우클릭 등 새 상품을 끊임없이 제시했다”며 “하지만 국민의힘은 반이재명 외엔 이렇다 할 어젠다 발굴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