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극일(克日)도, 반일(反日)도 아닌 화일(和日)을 택했다. 이 대통령이 "양국이 미래지향적 상생 협력의 길을 함께 열어 나가고자는 신념"(23일 한·일 정상회담 뒤 공동기자회견)으로 취임 뒤 첫 양자외교 방문지로 미국이 아닌 일본을 택했다고 밝히자,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화답했다. 한국의 진보 정부에 대한 일본 내 고질적인 우려도 어느 정도 걷히면서 양국 관계가 선순환의 흐름을 타는 분위기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23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정상회담을 시작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는 지난 23일 도쿄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채택한 공동언론발표문에서 "양 정상은 미래지향적이고, 상호호혜적인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며 양국 관계의 "안정적 발전"에 합의했다.

발표문에는 ▶정상 간 교류 및 전략적 인식 공유 강화 ▶미래산업 분야 협력 확대 및 공동 과제 대응 ▶인적교류 확대 ▶한반도 평화와 북한 문제 협력 ▶역내 및 글로벌 협력 강화 등 5개 분야에서의 정상급 협력 의지가 포괄적으로 담겼다. 구체적으로 수소·인공지능(AI) 등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고, 지방 활성화, 저출산, 고령화 등 공동 과제 해결을 위한 별도의 협력체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발표문에는 "이시바 총리는 1998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포함한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대목도 담겼다. 김대중·오부치선언은 일본 측의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표현을 담고 있는데,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에 이어 이시바 총리도 이를 확인한 것이다. 특히 양국 간 정상회담 결과물이 문서로 나온 건 17년 만인데, 과거사 관련 일본 총리의 공식 입장이 여기 명시된 건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과거사 문제는 이날 양국 정상에 의해 "어려운 문제"로 언급됐을 뿐 회담에서도 구체적 현안 차원에서 논의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24일 도쿄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과거사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현재와 미래 협력에 도움이 될까 하는 철학적 인식에 기반한 논의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23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한·일 확대회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 대통령의 이번 방일 자체가 '셔틀 외교' 재개라는 의미도 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방일은 전례 없이 일본을 첫 양자 정상회담 국가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컸고, 별다른 현안 없이도 자연스럽게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성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대북 유화적 접근을 강조해온 이 대통령이지만, 이날 발표문에 원칙론적 입장을 담은 것도 우방국인 일본과 공조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발표문에서 양 정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및 항구적 평화 구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했다"며 "한·미·일 공조를 바탕으로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가 충실히 이행되도록 국제사회와 협력을 지속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이 취임 뒤 공개적으로 "완전한 비핵화"와 "대북 제재 이행"을 밝힌 건 처음이다.

발표문에는 북한의 불법 사이버 활동, 러·북 군사협력 심화, 납치 문제 해결에 대한 공동 대응 등 북한이 민감해 하는 사안도 포괄적으로 담겼다. 동시에 "대화와 외교를 통한 북한 핵·미사일 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중요성"도 강조, 이재명 정부의 입장도 반영됐다.

다만 중국 문제에선 온도 차가 드러났다. 이시바 총리는 회견에서 “저는 힘 또는 외압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는 뜻을 (회담에서)밝혔다”고 명확히 했지만, 이는 발표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발표문에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정도로만 표현됐다. 이는 미국 주도의 대중 견제에 이미 깊숙이 동참하는 일본과 중국을 적대시하지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한국 간 입장 차이가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요시코 여사가 23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친교의 시간 중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한편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향한 이 대통령의 동선이 한·미 정상회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재명 정부가 한·미·일 3국 안보 공조에서 그간 '약한 고리'로 지적돼 온 한·일 관계를 공고하게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다.

위 실장은 "일본과 관계를 발전시키며 미국으로 협의를 하러 가는 데 대해 미국에서도 긍정적인 움직임으로 볼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날 발표문에는 "한·일 관계 발전이 한·미·일 공조 강화로도 이어지는 선순환을 계속 만들어 나가자"는 대목이 명시됐다.

이와 관련,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트럼프와의 첫 회담을 앞두고 도쿄를 거친 건 대미 협상력을 높이는 계기였고, 일본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이시바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도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 공동언론발표문은 향후 신(新) 선언으로 이어질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