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봉주 학원보다 더 벌었다" 학생 1500명, 정청래 뜻밖 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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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뉴스 메이커로 부상했다. 그는 최근 방송법, 노란봉투법, 상법 개정안 등 논란이 큰 법안들을 취임 한 달도 안 돼 강행 처리하고 추석 전 검찰 수술까지 진두지휘하고 있다.
제1야당과의 관계는 “사과와 반성 없이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는 취임 일성 그대로다. 반탄 지도부를 선출한 국민의힘은 끝까지 몰아세웠다. 내란 연루 세력이 드러나면 정당 해산 절차까지 나설 태세다. 그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가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동시에 그는 거대 여당의 독주가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실용과 협치를 내세운 대통령과 내란 종식을 외치는 정 대표의 당정 관계도 초미의 관심사다. 정청래, 그는 누구인가. 운동권 청년에서 여당 대표가 되기까지 인생 역정을 소개한다.
기사 전문은 중앙일보의 프리미엄 서비스 ‘더중앙플러스’ 구독 후 ‘이것이 팩트다’ 시리즈에서 볼 수 있다.
1화. 운동권 DNA
」최고위원 선거를 같이 했는데 정청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힘이 있었다. 법사위원장을 거치고 나온 정청래는 더 세졌다. 국민들이 보기에 인정할 게 있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세진 거다.
이재명 당대표 시절인 2022~2024년 정 대표(당시 수석최고위원)와 함께 최고위원을 지낸 4선 서영교 의원의 말이다. 정청래 대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의 강점을 실행력과 대중 친화력으로 봤다.
따뜻하거나 상대를 아주 배려하는 유형은 아니지만 자기 방식으로 치고 나가면서 사람들을 배려한다. 사람들이 목소리 내는 거에 귀를 기울이면서 필요한 법안을 잘 만들고 유머러스하게 다수의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압도적인 당대표가 됐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신임 당대표가 8월 2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제2차 임시전국당원대회에서 당대표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정 대표는 이번 선거에서 최종 득표율 61.74%로 박찬대 의원(38.26%)을 크게 이겼다. 2022년과 2024년 전당대회에서 77.77%, 85.4%를 기록한 이재명 대통령보다 낮았다. 그러나 친명 후보 간 경쟁에서 그것도 이 대통령과 더 가깝다고 평가되던 박 의원을 2배 가까운 표 차로 눌렀다. 당내 지지층이 예상보다 훨씬 두텁다는 방증이었다.
다른 평가도 있다. 수도권의 한 민주당 재선의원의 말이다.
생각이 달라도 만나서 협의하고 논쟁도 벌이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정치라고 본다면 정 대표에게 정치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정 대표 체제에서 당내 대화와 논의 과정이 실종되고 있다는 우려다. 그는 당심에 집중한다. 한 민주당 당직자는 “당원들이 내란 세력 척결을 원한다. 포용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게 나가는 정청래 대표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정청래 의원 홍보물. 사진 정청래 페이스북 캡처
내란 세력 척결과 검찰ㆍ언론ㆍ사법 3대 개혁 완성을 전면에 내세운 정청래식 정치가 막을 올렸다. 정 대표의 강경 발언이 연일 정치 뉴스를 장식하고 한쪽에선 정 대표의 독주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 쏟아진다. 정 대표 체제는 순항할까. 이 같은 의문이 과거를 소환했다. 그의 지난 행적과 기록, 발언, 뒷이야기를 살폈다. 현재의 정 대표(이하 경칭 생략)를 읽어낼 수 있는 결정적 장면을 키워드로 추렸다.
② 정치 입문 전 10년간 학원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었다는데 얼마나? 지금 그의 재산은?
③ 정청래의 파란만장 국회 입성기. 직접 돌린 명함만 2만5000장?
④ 막말로 공천 배제된 정청래, 2016년 5월 29일 19대 국회의원 마지막 날 있었던 일
⑤ 2007년 사진 한 장, 이재명과 정청래 18년의 인연
⑥ 운동권에서 당대표 된 정청래, 그는 대권에 관심 있나
키워드 ① 운동권 (1987~1991)

1989년 10월 13일자 중앙일보 1면.
정청래는 강경하다. 싸움의 한복판에 서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로 인해 세상의 입방아에 올랐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의 자산이었다. 강경 투쟁의 기억은 학생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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