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낮엔 직장인, 밤엔 프로레슬러…'MZ 악동'의 이중생활 [스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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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486]은 중앙일보 사진부 기자들이 발로 뛰어 만든 포토스토리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중앙일보는 상암산로 48-6에 있습니다.

부천 실내 체육관 링 위, 프로레슬러 최두억(28)이 상대 선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내리꽂는다.
“최두억! 브레인 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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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러 최두억이 지난달 30일 열린 고 이왕표 선수 7주기 추모 대회에서 대표 기술 '브레인 버스터'를 시도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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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버스터를 성공시킨 최두억(왼쪽)이 손을 들어 관중석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전민규 기자

 그가 대표 기술을 선보이자 관중석이 떠나갈 듯 환호가 터져 나왔다. 천둥 같은 충격음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어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들고 경기를 담는데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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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열린 고 이왕표 선수 7주기 추모 대회를 찾은 관중들이 경기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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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호, 홍상진 조경호(앞줄 왼쪽부터) 등 선수들이 이왕표 선수 7주기 추모 대회 시작에 앞서 영정을 들고 고인을 위해 묵념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지난달 30일, (사)대한프로레슬링연맹이 고(故) 이왕표 선수 7주기를 맞아 추모 대회를 열었다. 경기에 앞서 홍상진, 김민호, 조경호 등 근육질 선수들이 무대에 올라 영정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들 가운데 최두억도 함께 했다. 일본 레슬링 유학까지 다녀온 8년 차 ‘MZ세대 레슬러’, 그는 이날 선배들의 계보를 잇는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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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최두억 선수(왼쪽)도 선배들과 함께 이왕표 선수를 추모하는 대회에 참석했다.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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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러 최두억이 관객이 준비한 응원봉을 받아 들고 링으로 입장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그는 링 밖에서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다. 퇴근길 캡 모자를 눌러쓴 모습은 여느 20대 후반 남성과 다르지 않다. 172cm 남짓한 키, 널찍한 어깨에 살집 있는 체격, 순박한 미소는 호감을 준다. 최 선수는 투잡러다. 열악한 환경의 프로레슬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그는 평택 삼성전자 협력업체에서 반도체 오·폐수 센서를 관리한다. 아침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 늦으면 7시 반까지 일한다. 작업복을 벗고 퇴근하면, 다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거나 해외 레슬링 영상을 찾아보는 것이 퇴근 후 주된 일상이다. 잦은 부상으로 팔 하나 제대로 들기 힘든 날도 많지만, 그는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려면 버텨야 해요. 게으르면 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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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최두억 선수가 일하고 있는 평택 사무실을 찾아 그를 만났다. 검정 모자와 티셔츠, 청바지를 입은 모습은 영락없는 평범한 20대 직장인이다. 전민규 기자

 최두억이 레슬링을 택한 건 21살 여름,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 사고 때문이었다. 밤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오토바이를 몰다 사달이 났다. 깜빡 졸다 멈춰 있던 차량을 들이받으며 하늘로 튕겨 올랐다. 천만다행으로 큰 부상은 피했지만, 완전히 망가진 오토바이를 보며 다짐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자.” 어린 시절 TV 앞에서 눈을 반짝이던 순간이 떠올랐다. 헐크 호건·에디 게레로·존 시나·김일·이왕표 같은 전설들이 뛰던 링에 오른 자신을 상상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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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주택에 살고 있는 최두억 선수가 취미인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그는 "월 18만원을 내고 살 고 있다"며 "저렴한 덕분에 생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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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팬들이 선물해준 잡지를 살펴보곤 한다. 전민규 기자

 수소문 끝에 평택의 한 체육관을 찾았다. 두꺼운 매트 위에 몸을 던지고, 두들겨 맞고, 다시 일어섰다. 일주일에 두 번, 2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이 악물고 악착같이 연습에 매달린 끝에 데뷔에 성공했다. 체중도 20kg 넘게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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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부상 통증으로 인해 운동할 때 수건을 입에 물고 운동을 하고 있는 최두억 선수.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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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억 선수가 제작한 경기복. 우리나라 전통 도깨비 중 하나인 두억신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정강이 보호대는 '사고방지'를 기원하는 부적을 새겨 넣었다. 멕시코 업체에 주문을 넣었고 제작하는데 60만원이 들었다. 전민규 기자

 고생 끝에 데뷔했지만 기쁨도 잠시. 3년 차, 정체의 벽이 그를 괴롭혔다. 기술은 늘지 않고, 경기는 제자리였다. ‘더 좋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국 그는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일본 유학을 택했다. 한국보다 프로레슬링이 활발한 나라. 기대를 품고 도착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낡고 초라한 주차장 한쪽의 작은 링이었다. 훈련은 혹독했고, 함께 수학을 시작했던 동기 한 명은 엄격한 도제식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 이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두억은 꿋꿋하게 버텨냈다. 새로운 기술도 익혔고, 레슬링 문화와 팬들과의 교감하는 모습 등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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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레슬링 유학 시절 최두억 선수가 촬영한 체육관. 주차장 한켠에 링이 설치 돼 있는 모습이다. 사진 최두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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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시절 동기생과 링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사진 최두억

 6개월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한국 현실은 냉혹했다. 단돈 15~20만원을 받고 링에 올라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 자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면 자괴감 마저 몰려왔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나. 수십 번이 아니라 수만 번 고민했죠.” 그는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마음도 자고 일어나면 눈 녹듯 사라졌다. 또 어김없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포기할 마음으로 며칠을 고민해 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프로레슬링 이걸 빼버리면 제가 쏟아부은 20대의 삶이 설명이 안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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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왕표 선수의 추모 경기가 열리기 일주일 전 김포의 대한프로레슬링연합 체육관에서 홍상진 관장(오른쪽 둘째)과 선수들이 경기 진행 관련 회의를 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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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왕표 선수의 추모 경기가 열리기 일주일 전 최두옥이 선수들과 함께 체육관에서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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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옥이 김포에 위치한 대한프로레슬링 연합 체육관에서 자신의 주특기인 브레인 버스터를 연습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추모 대회 날 아침, 그는 다른 선수들과 함께 링 설치를 도왔다. 네 개의 기둥과 철제 프레임,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들을 직접 옮겼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표정은 밝았다. 평택 공장에서 만났을 때 표정과 달리, 반짝이는 눈빛이 오늘 이 공간의 주인공임을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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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왕표 선수의 추모대회가 열린 지난달 30일 오전 선수들이 철제 기둥 및 부품을 나르고 있다.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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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을 옮기고 조립하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이날 최두억이 상판을 테이프로 고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이날 네 번째 경기에 오른 그는 본인의 레슬링 캐릭터 ‘MZ 악동’으로 변신했다. 파트너와 함께 2대2 태그매치에 나서자마자 눈빛이 돌변했다. 의도적인 반칙, 의자 공격, 장외 난투까지 서슴지 않았다. 관객들은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쏟아냈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링도 사회도 그렇잖아요. 저는 늘 이기고 싶을 뿐이에요.” 비록 이날 경기는 장외 판정으로 무승부가 됐지만, 관객 반응은 뜨거웠다. 화끈한 액션은 약속된 각본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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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과 함께 순박했던 눈빛은 온데간데 없다. 상대 선수와 머리를 맞대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최두억.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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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편 가슴을 인정사정 없이 가격하고 있는 최두억.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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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억이 경기 전 미리 준비해 둔 철제 의자로 상대편을 가격하고 있다. 모든 상황은 약속 돼 있지만 이런 액션은 관객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전민규 기자

 만족스럽게 경기를 마친 그는 링 아래에서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챔피언 벨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겁니다. 박치기하면 김일 선생님이 떠오르듯이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덧붙였다. “비록 주목받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어도, 선배들과 함께 앞으로 도전할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프로레슬링을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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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도 훈련장에서도 최두억은 이 후드티를 즐겨 입는다. 등에 'NO PAIN, NO GAIN(고통 없이는 얻는 게 없다)' 적혀있다.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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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에 앞서 최두억이 링위에 올라 로프를 붙잡고 포효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 만큼은 영락없는 '진짜 프로레슬러'다.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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