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조약은 단지 종이일 뿐이다…안보 위기서 생존하려면 [Focus 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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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 재무장과 오스트리아 합병에 연이어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300여 만의 독일계 주민이 사는 주데텐란트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는 현지 감시와 함께 국경 방어 강화에 나섰다. 독일이 침략한다면 막기는 어려웠지만, 체코슬로바키아가 강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24년 프랑스와 맺은 동맹 조약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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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독일군의 진주를 환영하는 주데덴란트의 독일계 주민들.

그런 기대대로 1938년 8월 12일, 독일이 동원령을 선포하자 프랑스도 동원령을 내렸다. 그런데 정작 전쟁 분위기가 고조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지난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이 생생했기에 베르사유 체제를 유지하던 프랑스와 영국은 뮌헨에서 독일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9월 30일 다시는 영토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일의 주데텐란트 합병에 동의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는 처음부터 배제됐다.

이런 터무니 없는 결과를 만들고 귀국한 영국 총리 네빌 챔벌레인은 공항에서 협정 문서를 들고 득의만만하게 외쳤다.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5개월 만에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크족과 슬로바크족의 반목으로 국정이 흔들리자, 독일은 1939년 3월 15일, 프라하를 전격 점령한 뒤 체코를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이라는 이름으로 병합하고 슬로바키아에 괴뢰국을 세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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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벌레인을 영접하는 히틀러. 당사자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강대국들의 야합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이 결정됐다. 위키피디아

그러고 나서 독일은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를 내놓으라고 폴란드를 겁박했다. 이에 폴란드는 독일의 요구를 즉각 거부했다. 폴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123년 만에 독립한 신생국이었지만, 국토의 크기가 독일과 비슷하고 인구도 3500만에 이른 데다 10년 전만 해도 주변과 군사적 충돌도 마다치 않았기에 나름대로 강국이라고 자부했다. 더해서 1921년 체결된 프랑스와의 동맹, 1939년 8월 영국과 맺은 동맹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멀리 떨어져 있어 도움을 주기 어려웠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애당초 반드시 폴란드를 지켜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독일과 전쟁을 벌인다면 폴란드가 독일의 뒤통수를 때려주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전쟁이 시작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가 즉각 선전포고했어도 의미 있는 군사 행동이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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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바르샤바를 방문한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폴란드는 동맹국 군실권자를 극진히 대접했으나, 정작 필요할 때 버림받았다. 위키피디아

9월 7일, 40개 사단으로 구성된 프랑스 제1군이 독일로 진격하지만, 단지 국경 인근의 자를란트만 확보하고 걸음을 멈췄다. 폴란드 공략에 집중하던 독일이 최대한 접촉을 회피했기에 교전도 벌어지지 않았다. 9월 8일, 독일군이 바르샤바 북쪽에 모습을 드러내자 다급해진 폴란드는 연합국에게 적극적인 대응을 요청했으나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형식적인 답변만 받았다. 처음부터 폴란드는 버려진 상황이었다.

9월 17일, 독일과 동맹이던 소련이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경악했다. 소련에게도 선전포고해야 하지만, 이번에 그들은 최소한의 외교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는 이제 폴란드는 가망 없다고 단정하고 자를란트를 점령하고 있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폴란드가 격렬히 항의했지만, 프랑스는 어쩔 수 없다고 간단히 답했다. 그리고 10월 6일, 폴란드는 독립한 지 20년 만에 지도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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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체결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 서류. 이처럼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약속을 담고 서명한 문서는 단지 종잇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위키피디아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전 각국은 안전보장을 위해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이런저런 약속을 했다. 하지만 전간기 세계의 기본 룰이었던 베르사유 조약은 광인의 등장으로 순식간 무력화했다. 뮌헨 협정이 휴지통에 들어가는 데 5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가 영국·프랑스와 맺은 동맹은 필요할 때 가동되지 않았다. 더해서 폴란드는 독일·소련과 체결한 불가침조약이 유효한 상황에서 침략받았다.

모든 문서는 쌍방이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는 한 쉽게 버려질 수 있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특히 헤게모니를 가진 쪽의 의사에 따라 쉽게 중단 혹은 변질한다. 이는 비극적이었던 20세기 중반에만 있었던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사 이래 지금까지 마찬가지다. 그래서 안보와 관련된 부분이라면 약속이 어느 날 갑자기 깨질 수 있다는 최악의 가정 아래 미리 준비해야 한다. 물론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존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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