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백두산보다 높은 데서, '함께' 달린다...마라토너 인류학자가 …

본문

17576545543312.jpg

책표지

달리기 인류
마이클 크롤리 지음
정아영 옮김
서해문집

에티오피아의 바르유 이후니 데르셰는 2024 JTBC서울마라톤에서 2023년에 이어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톱10에는 에티오피아 1명, 케냐 7명, 모로코 2명이 올랐다. 국내 다른 마라톤대회나 해외 마라톤대회에서도 이런 현상은 종종 볼 수 있는 일로,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만큼 아프리카, 특히 동아프리카 마라톤 선수들의 기량이 압도적이다.

17576545545938.jpg

2024년 JTBC서울 마라톤에서 2시간 7분 37초의 기록으로 우승한 에티오피아의 바르유 이후니 데르셰. 그는 이 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중앙포토]

선두그룹에 동아프리카 선수들이 무리를 지어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왜 그들이 마라톤이나 장거리 달리기에 극강인지 그 비결이 궁금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은 결코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타고난 마라토너’가 아니었다. 창의적이고 직관적인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한 피와 땀의 결실이 맺어진 것이었다.

영국의 인류학자이자 마라토너인 마이클 크롤리가 지은 『달리기 인류』는 1960년 로마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아베베 비킬라와 바르유 이후니 데르셰의 모국인 에티오피아의 달리기 문화에 대한 인류학 보고서다.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 20분 만에 주파한 기록을 보유한 저자 크롤리는 15개월 동안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면서 수많은 마라토너, 코치와 함께 달린 생생한 현장 체험을 전하며 에티오피아 마라톤의 숨은 경쟁력들을 찾아냈다.

17576545548493.jpg

1960년 로마 올림픽 마라톤에서 에티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가 선두로 달리는 모습. 그는 맨발로 달려 '맨발의 아베베'로도 불렸다. [사진 서해문집]

현대 스포츠, 그중에서도 특히 현대 마라톤은 스포츠과학의 영향과 엄격한 통제 아래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개 선수들은 심박수 모니터와 GPS 시계를 착용하고, 신중히 계획된 페이스로 달린다. 달리기를 끝낸 뒤에는 GPS 데이터를 앱에 업로드하고 다른 사람들과 결과를 비교한다. 스포츠 과학자는 최고의 운동선수들을 테스트해 그들의 생리학적 지표를 측정한다.

지은이 크롤리는 에티오피아인들은 스포츠과학이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계산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선수들의 성공에 크게 작용한다고 믿고 있다고 전한다. 크롤리는 에티오피아인의 성공적인 달리기에는 보다 미묘한 문화적 요인이 작용한다고 확신했고, 이러한 요인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겪은 달리기 문화는 다양했다. 선수들은 일주일에 사흘을 몇 시간씩 버스나 차로 이동해 수도 아디스아바바 인근 해발 3200m의 엔토토산 같은 곳에서 달린다. 엔토토산은 2008년 베를린마라톤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 장거리 영웅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가 매일 아침 5시 30분에 달린 곳으로 유명하다. 선수들은 새벽에 일어나 백두산보다 높은 곳에서 신성한 땅을 밟고 특별한 공기를 마시며 달리기를 한다. 1㎞에 3분 50초 페이스로 70분간을 달린 뒤, 200m 언덕 스프린트를 12회 반복하는 훈련을 했다. 엔토토산의 공기가 세계적 기록의 마라톤 선수로 만들어 줄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17576545551247.jpg

에티오피아 세베타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달리기 동호회 선수들이 달리는 모습. [사진 서해문집]

마라톤 대회 선두그룹에서 뒤처지지 않게 ‘앞사람 발을 따라 뛰는 법’을 익히기도 한다. 그러면서 리듬감과 타이밍을 맞추는 능력을 키운다. 선수들이 똑같이 효율적이고 절제된 보폭으로 달리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훈련은 개인적으로 진행되는 적자생존식 경쟁이 아니라 함께 노력하는 과정이었다.

요일별로 긴 언덕 코스, 아스팔트, 부드러운 땅 등을 번갈아 가며 고도나 지면 유형을 달리해 다양한 방식으로 훈련한다. 빠른 달리기와 느린 달리기를 섞어 가면서 뛰기도 한다. 들판에선 특이하게도 지그재그 달리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선두에 선 세계적 마라토너가 그렇게 달리면 동네 10대 소년들도 따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수들이 서로를 보고 배우는 장점이 있다.

케냐의 엘리우드 킵초게 선수가 201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1시간 59분 40초라는 경이적인 비공식 기록을 세우자 서구 언론은 탄소섬유 판을 넣은 러닝화와 공기 역학적 달리기 대형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다. 이에 대해 한 에티오피아 선수는 “과학자가 기록에 대해 뭘 알아요? 직접 뛰지도 않으면서 연구한다고 하네요”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지은이는 에티오피아에 체류하면서 기술과 과학에 과도하게 의존한 나머지 영혼을 고갈시키는 훈련 방법론에 대한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17576545553722.jpg

지은이 마이클 크롤리. 영국의 인류학자이자 마라토너다. [사진 서해문집]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지금 ‘달리기 시대’를 살고 있다. 마라톤 동호회와 달리기 그룹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각종 달리기 대회마다 아마추어 러너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달리기의 신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이 책은 아마추어들은 물론 프로 마라토너들에게도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과학과 기술의 세계 너머에 있는 무언가 차원이 다른 마라톤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책장을 넘겨 볼 필요가 있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4,657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