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합의 수용 안하면 관세 다시 25%?" 교착상태 빠진 관세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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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 UPI=연합뉴스
미국과 관세 협상이 심각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지난 7월 말 한·미 양국은 큰 틀의 무역 합의를 이뤘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견을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에 미국은 지난 합의를 되돌릴 수 있다며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11일(현지시간) CNBC 방송에 출연해 “일본은 이미 계약서에 서명했다”며 “한국은 관세를 내든지, 협정을 받아들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합의 불이행 시 대미 관세가 현 15%에서 25%로 복귀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쟁점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다. 미국은 일본식 ‘백지수표’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원하는 시점·분야·방식에 따라 한국이 제한 없이 자금을 집행하는 형태로, 투자처나 금액 배분을 한국이 아닌 미국 측이 전적으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러트닉 장관은 일본의 알래스카 LNG(액화천연가스) 파이프라인 모델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양국이 투자위원회를 구성하고, 미국이 정한 해당 프로젝트에 일본 정부와 기업이 자금을 투입하면, 미국이 인력을 고용하고, 건설을 진행한다. 초기 현금 흐름이 발생할 때까지 미국과 일본이 50대 50으로 수익을 분배하며, 원금 회수 뒤에는 미국이 전체 수익의 90%를 가져간다는 설명이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의 20%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를 전액 지분투자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원금 회수 전까지 배당·이자 등 보장 장치가 없는 것도 문제다. 한국은 ‘직접 현금 투자’보다 보증 방식을 활용해 부담을 줄이자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미국은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지난 9일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일본과 외환보유고도 차이가 있고 기축통화국도 아닌데 (투자) 구조를 어떻게 짜느냐 문제가 많다”며 “근본적으로 외환시장에 미칠 충격을 같이 고민하고 미국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에 해답을 달라 요구하고 있다. 그 문제에 와서 교착 상태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앞으로도 한참 더 협상해야 한다. 이익되지 않는 사인을 왜 하나. 최소한 합리적인 사인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미국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8일 정부 실무협상단이 워싱턴D.C에서 미 상무부, 무역대표부(USTR) 관계자와 실무협의를 진행했지만, 큰 진전 없이 마무리됐다. 곧바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1일 방미해 러트닉 장관 등과 장관급 협의에 돌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0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한국 정부 협상단과 무역합의를 타결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관세 협상 결과를 이미 문서화한 일본의 사례도 한국 정부에 큰 압박이 되고 있다. 미국은 조만간 일본산 자동차 관세를 15%로 인하할 예정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일본이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 문제”라며 “한국이 합의한 3500억 달러는 현재 4000억 달러 수준인 한국의 외환보유액에 비해 과도해 이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 외환위기급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지난달 말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163억 달러로 미국이 요구하는 투자금액은 84% 수준에 달한다. 일본의 대미 투자 규모가 외환보유액(1조3242억 달러)의 41.5%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다. 아울러 일본의 순대외금융자산은 지난해 말 기준 3조6200억 달러로 한국(올 2분기 말 1조302억 달러)의 3배 이상이다.
미국은 민감한 농축산물 분야에서도 한국에 비관세 장벽 해소를 재차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정부는 쌀·소고기 등 농축산물 추가 개방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관세 협상에서 ‘과채류 수입 위생 관련 협력 강화’를 약속한 바 있어 검역 절차 개선 논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한 통상전문가는 “한국이 투자 문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면, 미국이 자동차 관세, 농축산물 시장 개방 등 수면 아래 있던 문제를 다시 협상 카드로 꺼낼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의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를 계기로 한국 정부가 비자 확대 문제 해결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서면서 협상 지형이 한층 복잡해지는 모습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미 협상에서 미국은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고, 한국도 미국 요구를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강대강의 ‘하드볼 게임’으로 치달을 수 있다”며 “국민경제적 득실과 외교적 함의를 모두 고려해 절충점을 찾아야 하는 한국 정부의 딜레마”라고 분석했다.
장상식 원장은 “투자 집행 기간을 장기로 늘리고, 달러 스와프 체결로 외환 불안을 완화하며, 투자 분야를 한국 주도 영역으로 좁히는 방안이 필요하다”며 “정부 부담을 줄이는 구조로 바꾸고, 대신 알래스카 에너지 장기 구매나 농축산물 시장 개방 등 다른 양보안을 패키지로 제시해 협상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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