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작가의 70년 실험 여정 한자리에...파주 하종현아트센터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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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문발리에 9월 1일 개관한 하종현 아트센터. [사진 국제갤러리]

하윤 하종현예술문화재단 이사장(왼쪽)과 하종현 화백.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다른 화가들이 캔버스 앞면에 물감을 바를 때, 그는 올이 굵은 마포 뒷면에 물감을 두껍게 바른 뒤 천의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 넣는 기법으로 작업했다. 이른바 '배압법(背押法)'이라 불리는 독특한 방식이다. 1970년대부터 이렇게 시작된 '접합' 연작은 고정관념에 머물지 않는 예술가 하종현(90)의 실험 정신을 대변하는 대표 연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접합' 이전에 그는 어떤 작업을 했고, 이후의 작업은 어떻게 발전해왔을까.
시기별 대표작 54점과 아카이브#총 3개 층 4개 전시장에 배치#우선 예약제 관람으로 출발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자' 하종현(90)의 예술세계를 총망라한 하종현 아트센터가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에 개관했다. 그동안 드문드문 열려온 전시가 작가의 특정 시기 작품을 주로 보여줬다면, 하종현 아트센터는 작가의 전 생애를 조망하며 시기 별 주요 작품들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연면적 약 2967㎡(약 897평) 규모 공간의 총 4개 전시장에 펼쳐진 대표작 54점과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가 평생 실험에 매진해온 작가의 예술 여정을 말없이 증언한다.
1층의 드넓은 공간을 차지한 1전시장엔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된 근작들이 전시됐다. 특히 2020년작 '접합 20-200'은 다채로운 형식의 접합 작품 7개를 나란히 배치하고 그 앞 바닥에 거친 질감의 천을 깔고 철조망을 올린 대형 설치작품으로, 압도적인 스케일과 강력한 색채로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접합'에 바친 작가의 50년 여정을 집대성한 작품이자 그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치열한 탐구 정신

3개 층 4개 전시장으로 구성된 하종현 아트센터.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지난 1일 파주에 개관한 하종현아트센터. [사진 뉴시스]
2층의 2전시장에선 1960∼1970년대 초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1935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난 하종현은 1959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60년대 초엔 앵포르멜(비정형 회화) 작업에 매진했다. 갈색·회색 등 어두운 색의 물감을 두껍게 올려 고목의 표피나 전쟁의 상흔을 연상케 하는 회화를 주로 발표했다. 앵포르멜 시기 이후 1970년까지 주력했던 기하 추상 작업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선 단청 문양, 돗자리 직조 기법 등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현대적인 시각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한 뒤 5년 간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업에 매달렸다. 용수철·밧줄·철조망 등의 재료를 적극적으로 화면에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3층 3전시장에는 1976년부터 2021년까지 다양한 시기의 '접합' 연작이, 4전시장에는 거울과 색채가 어우러진 후기 '이후 접합' 작업이 전시됐다. 물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색감과 효과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실험하고 탐구한 여정이 고스란히 보인다.
예약제 관람으로 시작
하종현 아트센터는 본래 출판사(미메시스)가 있던 건물을 하종현예술문화재단(이사장 하윤)이 몇 년 전 인수해 리모델링을 거쳐 탄생했다. 하 화백의 아들 하윤 하종현아트센터 이사장은 "평생을 일궈온 실험적인 작업세계를 한눈에 보여주고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이 아버지의 평생소원이었는데 이 꿈을 90세에 이루셨다"고 소개했다. 하 이사장은 이어 "평생 회화의 본질을 묻고 한계에 도전한 실험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작품의 힘과 밀도가 고스란히 전달되게 공간을 구성했다"며 "이곳이 단순히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을 넘어 현대 미술을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고 또 발전시키는 플랫폼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 1일 개관을 앞두고 아트센터를 찾은 하 화백은 "고맙다. 오늘이 최고의 날"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파주에 아트센터를 연 것에 대해 하 이사장은 "접근성을 고려해 서울에서도 후보 공간을 찾아봤다"며 "그러나 이만한 규모와 퀄리티의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우선은 아트센터를 상시 여는 대신에 예약제로 관람객을 받으려 한다"며 "앞으로 점차 프로그램을 늘려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홍익대 미대 학장과 서울시립미술관장을 역임한 하종현 화백은 사회 환원 및 후학 양성을 위해 지난 2001년 '하종현 미술상'을 제정해 작가와 비평가, 큐레이터 등을 대상으로 시상해왔다. 그동안 이배, 권여현, 서성록, 남춘모, 유근택, 이세현, 김수자, 조앤 기(Joan Kee), 알렉산드라 먼로 등 20여 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올해는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과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애슐리 롤링스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롤링스는 한국 단색화를 해석하고 국제무대에 소개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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