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지 자르고, 태우고, 쌓고....김민정 "작업은 수행 아니라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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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ZIP’,한지에 혼합매체, 69x100㎝. [사진 갤러리현대]

김민정, ‘Encounter’, 한지에 혼합매체, 199x143㎝. [사진 갤러리현대]
“불로 한지를 태우는 작업을 할 땐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잡념 없이 집중해 작업하는 과정을 가리켜 ‘수행’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워요. 수행보다는 오히려 놀이에 가깝습니다.”
김민정, 갤러리현대 개인전
마음이 더욱 여유로워진 걸까. 그의 작품은 이전보다 편안하고 밝아졌다. 불에 태워진 한지를 지그재그로 치밀하게 쌓아 올린 작품 ‘집(Zip)’ 연작은, 부드러운 파스텔 색채 덕분에 긴장보다 균형감과 리듬감이 도드라져 보인다.

김민정 작가. [사진 갤러리현대]
한지와 먹, 불을 재료로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해온 김민정(사진) 작가의 개인전 ‘원 애프터 디 아더(One after the Other)’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2021년 ‘타임리스(Timeless)’ 이후 갤러리현대에서 4년 만에 여는 전시로 한지를 염색하고, 가장자리를 불태우고, 반복과 겹쳐 쌓기 등의 독특한 기법으로 화면에 자기만의 선(線)을 구현해온 그가 최근 도달한 추상예술의 경지를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집(Zip) 연작은 안정감이 돋보인다. 가장자리가 태워진 한지 조각은 서로 조금씩 비스듬히 놓였지만, 각 조각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며 ‘완결’된다. 김씨는 “어렸을 때 옷의 지퍼를 올릴 때 느꼈던 신기함과 행복한 감정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며 “각 조각이 하나로 수렴되는 과정 자체가 치유와 같다”고 설명했다.
지하 전시공간에는 그의 대표 연작 ‘산(Mountain)’과 ‘타임리스(Timeless)’가 놓였다. 그는 “처음에 바다의 파도 소리를 표현하고자 했지만, 완성하고 나니 구불구불한 물결의 곡선이 고향 광주의 산과 닮아 있어 제목이 ‘산’이 됐다”며 웃었다. 지난해 아트바젤 바젤에서 먼저 선보여 호평을 받은 가로 8m 길이의 대작 ‘흔적(Traces)’도 눈길을 끈다. 맑은 먹의 곡선이 겹치며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풍경이 장엄하고 고요하다.

김민정, ‘Clouds’, 한지에 혼합매체, 39.5x48㎝. [사진 갤러리현대]
김씨는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1991년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국립미술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떠났던 그곳에서 그는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재료가 한지와 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한지는 그에게 재료 그 이상의 의미다. 그는 “장인의 손을 거친 한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며 “여기에 내가 무엇을 더한다는 것이 늘 조심스럽다. 늘 겸허한 마음으로 종이를 대한다”고 했다.
한지를 태우는 작업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그는 “모든 작가는 자기만의 선이 있다. 피카소의 선이 다르고 마티스의 선이 다르다”며 “한지를 태운 것은 나만의 선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시도한 실험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앞서 종이를 태운 작가들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작가들이) 종이를 태우는 게 파괴의 목적이었다면, 나는 종이를 매개로 내가 손으로 긋는 선보다 더 강한 선을 만들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종이를 태우는 행위가 그에게는 ‘소멸’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이었다는 의미다. 전시는 19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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