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스타 편집자에서 신인 작가로...정기현의 ‘태연한 산책자 감성’

본문

bt2d5628c2239d813bde1f29b8b3ac0b3f.jpg

올해로 출판 편집자 10년차인 정기현 작가. 지난해 민음사TV에서 기획한 '출근3일'에 출연했다. 사진 민음사tv 캡처

지금 출판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면 ‘민음사TV’일 것이다. 2019년 첫 영상을 올린 이 채널은, 10월 현재 약 34만 4000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조아란 마케터와 한국·세계문학 편집자들이 출연해 책을 소개하는 다양한 영상이 올라온다. 지난 9일 노벨문학상 발표를 함께 본 실시간 스트리밍엔 약 5000명이 동시 접속했다.

이 채널이 시작할 때부터 출판사 직원으로 출연한 정기현(33) 편집자는 민음사 편집자 출신인 김화진 작가와 함께 ‘말줄임표’라는 한국문학 코너를 진행해 온 ‘만담(漫談) 듀오’이자 채널 성장의 주역 중 하나로 꼽히는 원년 멤버다. 점잖은 표정의 정기현 편집자는 던지는 말마다 기묘한 웃음을 자아냈다. 그런 ‘정기현 감성’을 찾아 민음사TV를 챙겨보는 팬도 생겼다. 지난 6월, 그에게 독특한 이력이 한 줄 더 추가됐다. 바로 첫 책을 낸 소설가다.

bt83fd89c0e9180b24ed8645966b4d44dc.jpg

정기현 작가의 첫 책 『슬픈 마음 있는 사람』 표지. 사진 스위밍꿀

그는 2023년 출판사 열림원의 웹진 ‘림’(LIM)에 단편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6월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스위밍꿀)을 출간했다. 표제작은 동네에 적힌 출처불문의 낙서 ‘김병철 들어라’를 발견한 기은이, 준영이라는 인물에게 낙서의 실체를 밝히며 어쩐지 슬픈 마음을 느끼는 이야기다.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작가의 소설은 지난해(‘슬픈 마음 있는 사람’)와 올해(‘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문학과지성사의 문지문학상 후보에도 두 차례 올랐다. 분기마다 올해의 문지문학상 후보작을 모아 출간하는 시리즈 『소설 보다: 가을 2025』은 지난달 11일 나왔다.

책을 내자 정기현 앞에 붙은 수식어는 스타 편집자에서 ‘주목받는 신인 소설가’가 됐다. 소설집은 출간 후 한 달이 되지 않아 2쇄를 기록, 올해 안으로 3쇄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기현 작가와 지난달 30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했다는 작가는 “소설을 좋아했는데, 쓰기는 미뤄두고 있었다”며 “‘왜 나중에 쓰려고 하냐, 지금 쓰면 되지 않느냐’는 친구의 말에 (학부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0년 차 편집자인 정기현 작가는 퇴근 후 빠르면 7시, 저녁 행사가 있는 날엔 11시에 귀가한다. 귀가 후 1시간 동안 책을 읽고, 1시간 동안 쓰는 루틴을 확보했다. 그렇게 꾸준히 쓰다 웹진에 투고한 소설이 ‘농부의 피’다.

정 작가는 “소설을 쓸 때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는데, 교정을 보거나 소설집으로 엮는 동안은 읽힐 때 인상 깊을 장면이 무엇인지 생각한다”고 했다. “작가와 편집자로서의 삶을 분리하려 노력한다”고 했지만, 정기현의 글엔 방송에서 드러나는 ‘정기현 감성’이 담겨 있다. 딸의 실종 소식을 들었지만 돌아오리라 믿으며 태연히 살아보는 엄마가 등장하고(‘빅풋’), 여름방학을 맞아 할머니 집에 간 주인공은 곱게 꾸민 할머니와 키스하는 외국인 뱃사공을 보지만 크게 놀라지 않는다.(‘검은 강에 둥실’) 무턱대고 걷다가 비옥한 ‘남의 땅’을 발견하고 흙을 한 입 맛본 후, ‘나에게 농부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주인공도 나온다.(‘농부의 피’) 이상한데 왠지 웃기고, 슬프다.

bt000032105e7b1035b5d826dfc1eceda7.jpg

정기현 작가는 이탈리아의 이탈로 칼비노 작가를 좋아한다. 그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일상보다 붕 뜬 자리에 놓여있다.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고 했다. 사진 정기현 작가

책의 추천사를 쓴 임선우 작가는 그의 소설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기현 소설은 걷는 소설이구나. 그저 생각만 하는 멈블러(mumbler·중얼거리는 사람)들이나 최단 경로를 찾는 효율주의자들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배회하는 산책자의 소설!”

소설집에 실린 8편의 소설 속 주인공 역시 특정 공간을 배회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흔적엔 나름의 규칙이 느껴진다. 정기현 작가는 “실제 일상과는 다른 질서를 가진 세계지만, 소설 안에서는 납득이 가는 질서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독자가 소설을 떠올릴 때 ‘작품 속에선 이런 것도 가능했지’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줄곧 편안한 표정으로 보이던 정기현 작가는 “평소엔 걱정과 고민이 많은 성격”이라며 “어떤 상황이 와도 산책자 같은 상태로 모든 걸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선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무언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감각”은 작가가 “퇴근 후 도착한 소설 속 세계에서 아늑히 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편안함을 즐겼던 작가는 이제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첫 소설집의 작품을 쓸 때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안정감을 느꼈는데,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감정 기복이 크고, 사건도 있는 이야기다. 지금까지는 소설이란 형식을 먼저 떠올리고 그 안을 채워 넣을 것들을 상상하며 써왔다면, 언젠가는 쓰고 싶은 대상이 앞서는 글을 써보고 싶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3,511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