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쟁 후 한국 화단에서 ‘제3의 길’ 걸은 모던아트협회의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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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 지붕 위에 또 한 층 감투처럼 올리는 것이 두 평 가량 되는 나의 피난 화방이다. (한묵, '하꼬방 편상', 「희망」, 1953년 3월호)
정찰정을 얻어 타고 부산에 피란 내려온 처지여도 그림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한묵(1914~2016)은 남하 도중 아기를 받았다던 친구의 캔버스를 얻어 판잣집 풍경을 그렸다. 밥그릇 하나 앞에 둔 생활인의 처지는 ‘흰 그림’(1954)에 담았다. 박고석(1917~2002)도 비슷했다. 평양 출신으로 도쿄 유학 후 배화여고 교사로 일했던 그는 부산에 내려와 카레 장사를 했다. ‘한국의 루오’라 불리던 그가 그린 ‘범일동 풍경’(1951)에는 철길 건널목을 건너는 아기 업은 여인, 아이 손을 끌고 가는 표정 없는 사람들 너머로 판자촌과 전봇대가 보인다.

한묵, 흰 그림, 1954, 캔버스에 유화 물감, 72.5x60.5㎝, 유족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따로 또 같이 그리던 박고석ㆍ한묵ㆍ유영국ㆍ이규상ㆍ황염수는 1957년 ‘모던아트협회’를 결성, 연간 두 차례씩 동인전을 열었다. 국전의 아카데미즘도 앵포르멜의 급진적 전위성과도 다른 ‘새로운 미술’을 꿈꿨다. 협회 이름을 ‘모던아트’가 아닌 ‘제3 미술’이라고 고민했을 정도로 ‘다름’을 지향했다. 이후 천경자ㆍ점점식ㆍ임완규ㆍ정규ㆍ문신ㆍ김경이 합류, 1960년까지 6차례의 전시를 열 만큼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1960년 4ㆍ19의 격동 속에 한묵과 문신이 프랑스로 유학 가면서 협회는 흐지부지된다. 김경(1922~65)과 이규상(1918~67)은 이후 짧은 생을 마쳤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내년 3월까지 156점 전시

박고석, 범일동 풍경, 1951, 캔버스에 유화 물감, 39.3x51.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작가 기증.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마련한 ‘조우(遭遇): 모던아트협회 xxxx-xxxx’은 이 짧은 과도기를 들여다보는 전시다. 미술관 소장품 58점을 비롯해 156점이 출품됐다. 박고석의 ‘탑’(1958), 황염수의 ‘나무’(1950년대), 한묵 ‘태양의 거리’(1955), 유영국 ‘새벽’(1966) 등 35점이 첫 공개다.

이규상, 작품 A, 1960, 합판에 유화 물감, 155x90㎝,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규상의 기하학적 추상을 보여주는 ‘작품A’(1959)도 전시됐다. 가톨릭적 사유가 바탕이 된 그의 추상화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 ‘십자가의 길’을 상징하는 14처로 읽히기도 한다. 정규의 ‘교회’(1955)도 기하학적 단순화와 색면이 돋보이는데, 교회의 창문 대신 한자로 ‘규(圭)’자 서명을 하는 유머도 남겼다. 1960년대 산 그림으로 알려진 박고석마저 이들과 함께 기하학적 기본 형태를 실험했을 만큼 모던아트협회는 서로에게 느슨한 영향을 주며 ‘제3의 길’을 탐구했다.

정규, 교회, 1955, 캔버스에 유화 물감, 55x6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들은 기성세대가 확립하고자 한 국전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를 따르지 않았지만, 표시 나게 반기를 들지는 않았던 온건한 엘리트였다. 4년을 꽉 채운 짧고 굵은 활동 후 앵포르멜의 기치를 걸고 나타난 신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전시를 기획한 이효진 학예사는 “한국 현대미술의 기점이라 할 1957년부터 활동한 모던아트협회는 이후 단색화와 민중미술 등 한국 미술의 주요 움직임의 모태가 되었음에도 중요하게 다뤄진 바가 없다”며 “‘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고자 한 생활인들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자기 자리를 주장하지 않았던 이들의 상호 존중을 천경자는 이렇게 돌아봤다.
모두가 진정 마음의 사치를 누릴 줄 아는 멋쟁이였고 수수한 사람들이었다. 그룹전이라면 더러는 전시장에서 서로 좋은 자리에 자기 그림을 걸려고 전전긍긍하는 바보들의 행진 같은 야박스러운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한국 최초로 결성된 그룹 모던아트 동인들은 모두가 초연한 자세여서 그런 부끄러운 일이 추호도 없었다. (천경자, '모던아트의 멋쟁이 동인들-가난해도 순수했던 예술에의 열정', 「동아일보」, 1984.4.6)
미술관 2층 ‘보이는 수장고’에는 1970년대부터 ‘장미의 화가’로 알려진 황염수의 장미 연작과 팬지, 해바라기, 양귀비 등 꽃 그림 22점을 모아 걸었다. 내년 3월 8일까지, 입장료 2000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조우, 모던아트협회 xxxx-xxxx' 전시전경. 맨 왼쪽에 천경자의 '환(歡)’, 맨 오른쪽에 이건희컬렉션으로 이번에 첫 공개된 유영국의 '새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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