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세상이 망한다면, 후련한 이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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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작가가 신간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를 냈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지구에 더는 인간이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설정을 배경으로 한 세 편의 연작소설이 묶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109년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으로 향하는 이주 우주선,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지 5년이 지난 지구, 인간은 멸종하고 좀비와 동식물만 남은 세상…. 27일 출간되는 천선란(32) 작가의 연작소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허블)가 담은 세 배경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소설은 시공간이 다르나 좀비로 인해 지구가 멸망했다는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망했어. 아주 처참하게.”
지난 21일,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만난 천선란 작가는 “하나의 세계관에도 여러 삶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연작소설의 매력”이라고 밝혔다.
작가는 2019년 민음사 황금가지의 온라인 소설 플랫폼에 장편 SF소설 『무너진 다리』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받았고, 2020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올해 10월 기준 48쇄, 20만 부 판매량을 기록한 『천 개의 파랑』은 지난해 연극과 뮤지컬로 만들어졌고, 지난 5월엔 워너브러더스 픽처스와 영화화 계약도 체결됐다.

매년 소설을 발표한 천선란 작가에게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특별한 작품이다. 한국과학문학상을 받기 전 허블과 계약해, 6년간 구상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장르로 꼽아온 “좀비 아포칼립스(Apocalypse) 장르”이기도 하다. 그는 “좀비는 인간만 느끼는 디스토피아(Dystopia)”라며 “좀비라는 존재엔 죽은 인간이 다시 살아나 나를 찾아온다는 것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내재돼있다. 대상을 향한 엄청난 그리움과 사랑도 담겨있다. 얼마나 보고 싶으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했을까”라며 장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작가는 퀴어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3부를 쓴 후 1부와 2부를 대폭 수정해 이번 연작소설을 마무리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종말은 암울한 개념이지만, 정말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까? 기존 제도가 붕괴됐을 때 후련해지는 사람. 그런 인물을 떠올리면서 소설을 완성했다.” 작가는 “‘세상이 망했다’고 전하는 인물들의 말 앞에 ‘드디어’라는 부사가 생략돼있다”고 했다. “‘빨리 일어나봐. 세상이 망했어. 네가 원했던 세상이야.’ 이런 의미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속 인물들은 제도로 규정되지 않은 소수자성을 띤다. 1부엔 가정폭력의 경험을 공유하며 대안가족을 이루어 사는 이들이 주인공이다. 2부엔 좀비가 휩쓸고 간 잔해 속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서로를 돌보며 사는 모습이 그려진다. 좀비 장르의 매력은 살리면서, 제도의 붕괴로 존재감이 더욱 뚜렷해지는 관계를 들여다봤다.
그는 “이제까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면, 요즘엔 사람들을 내 소설로 초대하고 싶어 쓴다”며 “전작을 쓸 땐 작가로서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끼숲』(2023)과 『모우어』(2024)를 기점으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치지 말고 쓰자는 생각뿐이다. 가까운 시일 내 새 좀비 소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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