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구자라트주의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스 원유 공장. AP=연합뉴스

러시아 석유기업을 겨냥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對)러시아 추가 제재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러시아산 원유의 최대 수입국인 중국과 인도가 구매 중단에 나섰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의 제재 발표 이후 중국과 인도 정부가 관련 기업들에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줄이라고 요청했다고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2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동이 취소됐다며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 로스네프트와 루코일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이번 조치로 이들 기업이 직·간접적으로 50% 이상 지분을 가진 모든 법인은 자산이 동결된다.

FT에 따르면 인도에서 러시아산 원유를 가장 많이 사는 민간 기업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즈는 정부 지침에 따라 수입량을 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즈는 지난해 12월 로스네프트와 10년간 계약을 체결하고 저렴한 가격에 러시아산 원유를 공급받아왔다. 대부분 인도 정유사는 제삼자 거래를 통해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데,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즈는 직접계약을 맺은 만큼 미국의 2차 제재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 관계자는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즈가 “(미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도 국영 석유회사 등에 해상을 통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중국 국영 석유기업과 거래해온 한 관계자는 “미국 제재 이후 중국 기업들이 일시적으로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중단했다”고 FT에 전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로스네프트 사무실 외관. 로이터=연합뉴스

석유·가스 수출은 러시아 연방 예산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특히 중국과 인도는 하루에 각각 200만 배럴, 150만 배럴의 원유를 사들이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 원유 수출의 약 80%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미 재무부가 러시아 석유기업과의 거래 중단 기한으로 정한 11월 21일 이후 원유 수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트럼프 대통령과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러시아 석유 기업을 직접 제재하기를 꺼려왔다. 하지만 최근 원유 공급이 늘고, 국제 유가가 크게 하락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미국의 제재 발표 전 브렌트유 가격은 최근 5개월 만 최저 수준인 배럴당 60달러를 기록했다. 바이든 행정부 시기보다 평균 20달러 낮은 수준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제재의 효과에 의문을 가져왔는데,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다”며 “유가 상승 위험에도 러시아 에너지를 마비시키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에 토마호크를 제공하는 것보단 러시아 제재가 훨씬 안전할 것(FT)”이라는 계산도 깔렸다.

지난 8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백악관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키르 스타머 영국 총리, 조르지아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마크 루테 나토 사무총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알렉산더 스텁 핀란드 대통령과 만나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을 논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도 러시아의 석유 가스 수익을 겨냥한 추가 제재를 내놨다. 미국과 같은 날 EU는 러시아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금지 등을 포함한 19차 대러시아 제재 패키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미국과 유럽이 대러시아 압박에 발을 맞춘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한 달간 미국과 EU 관리들이 러시아 경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압박하는 방안을 긴밀히 협의해왔다”며 “양측이 러시아 주요 석유 기업과 거래하는 은행을 공동 제재하면 효과는 더욱 강력해진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유럽의 합동 공세에도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제재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서방의 제재가 러시아의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세계 에너지 시장이 러시아산 원유를 대체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