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미국 추상화가에 놀랐다…바닥부터 시작한 김환기
-
7회 연결
본문

김환기의 ‘무제’(1967). [사진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이번 대상을 받은 아돌프 고틀리브는 참 좋겠다. 미국에서 회화는 이 사람만 출전시켰다. 작은 게 100호 정도고 전부가 대작인데 (중략) 양 뿐 아니라 내용도 좋았다. 내 감각과 동감되는게 있었다.” (김환기 ‘상파울루전의 인상’,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중)
1963년 10월 김환기(1913~74)는 김포공항에서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상파울루 비엔날레로 떠났다. 1951년 시작한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현대미술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비엔날레로 빠르게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섬의 달밤’ 등 세 점을 출품한 김환기는 회화 부문 명예상을 받았다. 한국 미술가의 첫 국제전 수상이다. 참가단 대표로 수집한 자료를 문교부에 보낸 뒤 경유지 뉴욕에 도착한 김환기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50세, 한국 미술협회 이사장이자 홍익대 교수였지만 미국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당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만장일치로 최고상을 받은 이는 미국 대표로 단독 참가한 아돌프 고틀리브(1903~74). 고틀리브는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와 함께 뉴욕 화파(New York School)를 결성, 미국 추상 표현주의를 이끌었다. 1968년 3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휘트니 미술관이 동시에 고틀리브 회고전을 열었다. 두 미술관이 한 작가의 회고전을 동시에 연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서울 이태원로 페이스갤러리에서 이 두 사람의 전시 ‘추상의 언어, 감성의 우주: 아돌프 고틀리브와 김환기’가 31일부터 열린다. 생전 가까이 교류했지만 두 화가가 함께 전시하는 건 처음, 사후 51년 만이다. 아돌프·에스더 고틀리브 재단과 환기재단의 협력으로 기획된 이번 전시에는 두 화가의 1960~70년대 회화 16점이 나왔다. 서로 다른 문화적·철학적 토대 위에서 두 화가가 닮은 듯 다른 시각 언어를 어떻게 구축했는지 조명한다.

고틀리브의 ‘확장’(1962). [사진 아돌프·에스더 고틀리브 재단]
고틀리브는 큰 화폭에 해와 달이 연상되는 둥근 형태를 번진 듯 맑게 그리고, 아래 서예를 닮은 붓자국을 남겼다. 김환기가 “내 감각과 동감되는게 있었다”고 할 만했다. 고틀리브는 1940년대 전면 격자 구조에 기호를 결합한 ‘픽토그래프’ 연작에 이어 1950년대 떠도는 원형과 폭발적 붓질을 병치한 대표 연작 ‘버스트’를 내놓았다. 서울 전시에도 ‘버스트’ 연작 세 점이 걸렸다.
한 명의 작품으로 추상 표현주의의 정수를 보여준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고틀리브 전시에 김환기는 압도됐다. 당시 김환기는 1956~59년에 이어 다시 파리에 가볼 생각도 했다. 그러나 비엔날레에서 본 프랑스 미술에 대해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며 뉴욕에 머물 결심을 굳혔다. 값싼 호텔에서 지내며 아는 화가의 작업실에서 더부살이로 그림을 그리다 1964년 9월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고서야 맨해튼에 작업실을 얻을 수 있었다. 상파울루에서 만난 고틀리브와는 뉴욕에서도 교류했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김환기(오른쪽)가 자신의 출품작 ‘구름과 달’ 앞에 비엔날레 설립자 치칠로 마타라조(맨 왼쪽)와 함께 섰다. 이후 그의 화폭에서는 형상이 사라져간다. [사진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뉴욕에서 김환기의 화폭은 점점 커진다. 달항아리와 매화를 즐겨 그리던 화풍도 크게 변한다. 형상은 점점 사라져 십자구도가 됐다가 1965년부터 초기 점화의 형태가 나오고,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전면 점화를 그리며 현지의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4년 3월 고틀리브에 이어 김환기도 7월 세상을 떠난다. 디스크 수술 후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낙상, 뇌출혈이었다. 전시는 내년 1월 10일까지, 무료.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