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해받는 과학자만은 아니었다, 궁정의 사회적 게임에도 능했던 갈릴레오[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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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궁정인 갈릴레오
마리오 비아졸리 지음
박초월 옮김
소요서가

이른바 '갈릴레오 재판'을 널리 회자하는 일화로 끌어 올린 것은 19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의 개신교도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자명한 진리를 억압하는 가톨릭이란 이미지를 부각시켜, 과학과 개신교가 서로 적대할 이유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했다. 그런 시도는 역효과를 낳은 것 같다. 편협한 논쟁들이 촉발됐고, 과학 전체와 모든 종교 사이의 관계를 몇몇 일화에 근거해 단정하는 투박한 유습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

지금까지 과학사 연구 성과들을 종합하면, '갖가지 과학 연구 중 몇몇이 특정 시기에 한 종교의 일부 종파에서 지원을 얻어내거나 갈등을 겪기도 한다'가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는 최대치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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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xxxx-xxxx)의 노년 모습을 담은 초상화. 퍼블릭 도메인에 속하는 이미지.

그럼 갈릴레오 재판은 무엇이었을까? 20세기 후반 대두한 견해를 흥미 본위로 요약하면, 일종의 개인적인 사고(事故)였다. 갈릴레오는 각종 수사학적 기교를 동원해 창의적이고 발랄하게 태양중심설을 성공적으로 옹호했다. 그런데 나름 절친인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허락으로 1632년에 쓴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가 자칫 교황을 우둔하다고 모욕하는 것으로 풀이될 여지가 있었고, 교회 내 반교황 파벌들이 이를 부채질했다. 교황 개인의 배신감과 분노가 재판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미국 과학사학자 마리오 비아졸리의 1993년 『궁정인 갈릴레오』(원제 Galileo, Courtier) 출간은 갈릴레오 재판을 바라보는 관점과 문제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국내에 처음 번역된 이 책은 갈릴레오 재판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음을 함축하는 동시에 갈릴레오가 사회 문화적 밑천을 활용해 새로운 과학을 창출하던 모습을 보여준다. 나아가 새로운 지식이 당대의 사회관계 속에서 어떻게 정당성을 직조·확보하는지도 보여주었다.

절대주의 시대 유럽의 사회문화는 군주와 봉신 관계 대신 군주와 총신의 관계로 중심이 옮겨졌다. 총신의 지위와 권력은 군주가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고, 궁정인들은 군주의 총애를 다투었다. 예술가, 문필가, 학자들도 궁정을 구성하는 총신의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고 또한 그럼으로써 본격적인 궁정문화가 번성했다. 군주가 총신을 숙청하는 일은 자주 일어났고, 필수적이기도 했다. 그래야 다른 궁정인들도 지위 상승을 위해 새로이 더 충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과 교황청 궁정이 만들어낸 권력·후원·위신의 체계 속에서 활동하면서, 학문보다 기예로 취급되던 비천한 수학의 지위를 자연철학에 버금하는 지위로 끌어올렸다. 나아가 수학을 자연철학의 토대로까지 정초하고자 했다. 또한 자연과 인위의 엄격한 구별에 구멍을 내어 망원경과 같은 인위적 도구를 사용한 결과, 즉 인위에 오염된 자연도 자연철학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인위를 가해야 자연의 숨겨진 본성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궁정인 갈릴레오』는 현대에 '갈릴레오 위성'이라 불리는 목성의 네 위성을 ‘메디치별’로 명명하고 메디치 가문에 헌정한 1610년부터 1633년의 갈릴레오 재판까지에 집중한다. 갈릴레오가 메디치 가문에 헌정한 행위는 단순한 아부나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라, 지식 생산과 사회적 정당화가 맞물린 정교하고 복합적인 행위였다. 이는 후원자에게 ‘신뢰와 위신’을 제공하는 궁정적 공연이었고, 갈릴레오는 피렌체 궁정의 자연철학자라는 총애를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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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궁정인 갈릴레오' 서평용 이미지. 크리스티아노 반티의 1857년 그림 '로마 종교재판에 직면한 갈릴레오'. 퍼블릭 도메인에 속하는 이미지.

책의 중후반부는 그가 로마 교황청 궁정 내 경쟁 속에서 위신을 확보·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세밀히 ‘이미지 정치’를 수행했는지 보여준다. 후원자·학자·성직자들이 주고받는 사회적 게임이었다는 점에서, 과학적 논쟁과 궁정의 위계질서가 한 몸처럼 작동했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갈릴레오의 실수나 잘못인 주장들이 나름 궁정인으로서의 에티켓과 암묵적 규칙을 따른 행위이기도 했음도 보여준다. 군주의 위신와 궁정의 활기를 위한 공연으로서 논쟁은, 수사학적 참신함을 포함해 흥미로워야 하지만, 명백하고 일방적으로 승리해버리는 것은 금기였다. 군주의 권위를 침해하기 때문. 이런 면에서 비아졸리의 갈릴레오는 성공을 거듭한 끝에 예정된 몰락을 겪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으로도 보인다.

비아졸리의 연구는 사회변화와 맞물려 새로운 부류의 지식이 권위와 정당성을 획득하는 시대에 여러 가지 영감을 준다. 미국 UCLA 교수를 지낸 그는 올해 69세로 작고했다. 역사학을 넘어 연구진실성, 지적재산권, AI의 저작권 문제 등 그가 연구해온 폭넓은 분야에서 추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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