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남성들의 이유 있는 분노...적은 여성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사회구조[BOOK]

본문

bt4d4cd96a043c791b8dc781a8826f5b4c.jpg

책표지

젊은 남성은 왜 분노하는가?
사이먼 제임스 코플런드 지음
송은혜 옮김
바다출판사

2003년인가 파리 특파원으로 있을 때 즉결심판을 받은 적이 있다. 교통신호 위반으로 딱지를 뗐는데, 억울한 측면도 있고 이참에 프랑스 재판 시스템도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범칙금 납부를 거부하고 이의신청을 냈었다. 소환장을 받고 뱃심 좋게 재판정에 들어갔다가 놀란 게 있다. 판사도 여자, 검사도 여자, 바쁜 피고인을 대신해 출석한 변호사 대여섯 명 모두 여자였던 것이다. 나처럼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방청석을 가득 메운 50여 명의 피고인들만 하나같이 남자였다.

그때 남자로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남성들, 특히 젊은 청년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내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깊고 절실하다. 많은 남성들이 학교에서 여성보다 낮은 점수를 받고 대학진학률은 더 낮으며 학습장애 빈도는 더 높다. 남성이 더 많은 자살을 시도하고 일터에서 더 많이 사망하며 압도적으로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많은 영역에서 여성에 뒤처지는 남성들은 그것을 여성과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며 분노하고, 일부이긴 하지만 여성들은 그들을 열등감에 빠진 낙오자, 미성숙한 찌질이라고 조롱한다. 호주국립대학(ANU) 사회학 연구원으로 이른바 ‘남초(男超)’ 커뮤니티, 서구 개념으로는 ‘매노스피어(manosphere)’에서 젊은 남성들이 표출하는 분노를 탐구해온 저자는 이런 두 가지 시각이 모두 틀렸다고 단언한다. 여성과 페미니즘을 남성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잘못된 피아 식별”인 것처럼 남성이 느끼는 분노와 억울함에는 어느 정도의 정당성과 보다 깊은 구조적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원인을 신자유주의에서부터 찾는다. 신자유주의는 20세기 동안 유지된 경제적, 사회적 규범을 전반적으로 해체했다. 일에 대한 전통적 개념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경제적 안정성을 약화시켰으며, 자유라는 이름 아래 노동을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사실 신자유주의로 인한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는 남성뿐 아니라 초부유층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성을 해쳤다. 특히 여성과 유색인종은 매노스피어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남성에 비해 훨씬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일부 백인 남성들이 이러한 위기에 젠더화된 방식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가 경제 시스템을 넘어 “삶의 전방위적 경제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과거 여성을 보호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을 의미하던 남자다움은 이제 외모와 돈으로 수렴되는 ‘장식적 문화’로 바뀌었다. 이에 많은 남성들이 자신은 남성성을 상실했다고 믿게 되고, 외모와 돈만 보고 남자를 선택한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에게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ressentiment)’, 즉 원망과 적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위안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열심히 활동할수록 오히려 고립되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잔인한 낙관주의’에 빠지고 만다. 결국 외부인에 대한 극단적 혐오와 폭력으로 무장한 극우세력의 먹잇감이 돼 심한 경우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다.

저자는 이러한 남성들의 이유 있는 분노를 해결할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젠더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가 나서 그들의 삶 전반을 개선해야 한다. 젊은 청년들에게 오프라인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소속감을 제공하고, 안정적인 고용을 창출해 경제적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당장 효과를 보기 어려운 장기적 과제이긴 하지만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적극 나서야 할 일이다. 이 책은 주로 서구사회의 백인 남성을 다루고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현실은 이와 다르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2,486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