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열네살 소년의 위험한 '라디오 청취' [왕겅우 회고록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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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나는 연애소설 집필에 착수했다. 이포에서 그 전해에 상영된 중-영 합작영화로 야들야들한 상하이 뮤지컬이 하나 있었는데 그 플롯을 활용한 것이었다. 써 보지 않은 단어 목록이 많이 쌓여 있어서 그 단어들을 써 보려고 했다. 목록의 단어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몇 달 동안 매일 몇 장씩 써나갔다. 전쟁이 끝날 때는 약 2백 장 원고가 쌓여 있었다. 크게 중시하지 않은 일이라서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되자 팽개쳐버렸고, 아마 후에 중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것 같다.

빌려온 책을 읽던 1년간 나는 길거리를 떠나 지내며 자유의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 글을 읽을 수 있고 생각을 굴릴 수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라도 적응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처음으로 갖게 된 때였다. 나는 인생의 목적을 찾았고, 더 이상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그 무리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느꼈다. 여러 세상을 향하는 눈을 열어주는 책들과 어울리는 편을 내가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옛날 중국의 미인들, 시인들과 도덕가들의 세상만이 아니라 우주여행, 비극적 영웅들, 능란한 형사들, 허세 부리는 멍청이들, 심지어 멋쟁이 도둑들의 온갖 세상이 내 앞에 펼쳐졌다.

1945년에 아버지를 가정교사로 채용한 학까족 광산업자는 자기도 표준어를 배우고 자식들에게도 배우게 하고 싶어 했다. 이 일을 맡으면서 우리는 신도시의 남쪽 변두리 킨타 강가의 그 집으로 이사했다. 예 씨 집에서 충삼(鍾森) 씨 집으로 옮긴 것이 전쟁 중 마지막 이사였다. 그해 말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그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충 씨는 주석광산에서 쓰는 전동기계를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광둥성 메이셴(梅縣)에서 말라야로 온 사람이었다. 일본점령기 동안 수익성이 떨어진 광산 몇 개를 매입해 그 생산성을 회복시킴으로써 큰돈을 벌었다.

부모님은 저택 본관의 좋은 방을 제공받고 나는 뒤채의 방 하나를 기술자 한 사람과 같이 썼다. 그 무렵에는 나도 프랜시스 리 가족과 지내며 학까어를 꽤 익혀서 그 집 사람들과 말이 통했다. 충 씨는 그것을 반가워하면서도 가족들에게 나랑 얘기할 때는 표준어만 쓰라고 했다. 충 씨는 아버지랑 달라서 체력 단련을 중시했고, 아침마다 잔디밭에서 함께 체조할 것을 우리에게도 권했다. 내게 마침 꼭 필요한 권유였다. 음식을 잘 먹게 되면서 비쩍 마른 몸매에 살을 붙이기 위해 운동이 필요할 때였다. 덕분에 몸이 튼튼해지고 전쟁 후 학교에 돌아갔을 때 체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영어에 접할 또 하나 예상치 못한 기회가 그때 찾아왔다.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중을 통해 찾아온 기회였다. 충 씨는 주변에 별로 없는 재간이 내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영어 능력은 당시 기준으로 뛰어난 편이었다. 충 씨는 외부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전기 기술자인 직원을 시켜 단파라디오 하나를 만들어 놓았었다. 아침마다 영어 뉴스를 듣고 아침식사 때 요점을 알려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1945년 초의 일이었다.

라디오 전파가 약해서 영어를 귀로 듣는 일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뉴스 내용 중에 새로 알게 되는 것이 많아서 공부도 많이 필요했다. 몇 주일 지난 후에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참을성 있는 분이어서 내가 중요한 뉴스를 뽑아 드리게 될 때까지 격려를 계속해 주었다.

영어 화법에 여러 가지가 있음을 차츰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다가 오랫동안 듣지 않게 된 그 영어만이 아니라 소설에서 읽으며 표준적 구화(口話)로 생각하던 영어와도 다른 화법들이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표준 영어로 나오는 방송에 집중했다. 주로 델리나 콜롬보 방송이었다. 이따금 나오는 말 중에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 말씨가 있었고, 곧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어른들의 전쟁에 내 방식으로 끼어들게 된 것이다.

1944년 후반 중국 중-남부의 후난성과 광시성에 대한 일본군의 공세 이후 중국군의 형세가 내내 좋지 않다는 것, 영국군이 버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연합군의 전세가 괜찮다는 것과 미군이 태평양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동안 이포의 경제적 사정이 나빠져서 인플레이션으로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영국인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충 씨는 사업가로서 상황의 전개 방향을 확실히 알고 싶어 했다. 1945년 중엽이 되자 그분은 일본인이 도입한 “바나나 화폐”가 어찌 될지 뉴스를 잘 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돈이 쓸모없게 될 것 같으면 말라야 달러로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바꿔놓아야 할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진 문제였고, 바나나 화폐의 가치에 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암시장의 달러 가격은 매일같이 올라갔다.

비밀라디오 청취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경고도 있었다. 적발된 사람이 일본군에 처형당한 사례도 알려져 있었으나 우리 라디오는 작고 감추기 쉬운 것이어서 들킬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 무렵에 나는 내 하는 일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영국 측에서 일본 측 화폐의 유통을 인정하지 않을 낌새를 담은 소식을 찾아냈을 때. 이 뉴스를 전해 드리자 충 씨는 매우 흡족해했다. 자기 예상에 부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달러를 꾸준히 사들이고 있었고, 전쟁 후 재산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라디오 청취는 열네 살 소년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세계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머나먼 곳들을 내 마음속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몇 해 전에 열심히 들여다보던 지도책 덕분이었다. 버마 북부와 인도 동부의 전투 지역들이 특히 익숙해졌고, 태평양의 섬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항구들도 알게 되었다. 매일같이 들리는 전쟁 지도자들의 이름, 처칠과 루스벨트에서 히틀러와 스탈린, 장제스와 마오쩌둥, 도조 장군과 야마모토 제독 등이 내 귀에 익숙해졌다. 이름마다 그 인물의 특성을 나타내는 간결한 수식어가 붙어 나왔다. 편향된 정치교육에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작은 도시가 강력한 역사적 세력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일으켜주었다.

전쟁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방송에 나오는 유럽과 아시아의 전투들이 하나같이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장소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태평양의 두 곳이 왜인지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과달카날과 미드웨이. 전부터 알고 있던 진주만과 함께 해상과 공중에서 미군의 눈부신 활약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군 격파의 최전선에 미 해병대가 있고,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는 이유가 거기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라디오를 켤 때마다 “우리 편”에 대한 내 희망은 자라났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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