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AI 이니셔티브에 서명한 뒤 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왼쪽은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오른쪽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AP=연합뉴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전략 경쟁에서 핵심 승부처로 꼽히는 인공지능(AI) 산업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 등 우방국을 규합한 새로운 AI 중심 협력 구상을 추진한다.

미 국무부는 11일(현지시간) 미국이 일본, 한국, 싱가포르, 네덜란드, 영국,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UAE), 호주 등 8개국과 함께 12일 첫 ‘팍스 실리카(Pax Silica)’ 서밋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국무부는 팍스 실리카를 핵심광물과 에너지, 첨단제조, 반도체, AI 기반시설과 물류를 아우르는 “안전하고 번영하며 혁신적인 실리콘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한 미국 주도의 전략적 구상”이라고 설명했다.

팍스 실리카는 평화를 뜻하는 라틴어 ‘팍스(Pax)’와 반도체 핵심 소재인 ‘실리카(Silica)’를 결합한 명칭으로, 로마 제국과 미국이 각각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시기인 ‘팍스 로마나’와 ‘팍스 아메리카’를 연상시키도록 의도됐다.

국무부는 미국이 팍스 실리카를 통해 “파트너 국가들에 AI가 주도하는 번영의 시대를 보증하는 견고한 경제 질서를 구축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세계 기술 공급망 전반에 걸쳐 안전하고 회복력 있으며 혁신이 주도하는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국가 간 연합을 조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공식적으로 중국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팍스 실리카의 이면에는 AI와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을 빠르게 추격하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깔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무부는 참가국들이 “민감한 기술과 핵심 기반시설을 우려 국가의 부당한 접근이나 통제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공동의 의지를 확인했다”고 밝혔는데, 미국이 첨단기술 분야에서 말하는 우려 국가는 통상 중국을 의미한다.

반면 참가국들은 세계 AI 공급망을 이끄는 주요 기업과 투자자들이 포진한 미국의 핵심 우방국들이다. 국무부는 향후 팍스 실리카 참여국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국무부는 참가국들이 “경제안보가 곧 국가안보이며 국가안보가 곧 경제안보”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합의를 바탕으로 공급망 안보 강화, 강압적 취약성 대응, 신뢰 가능한 기술 생태계 구축 등에서 협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중국 견제라는 미국의 전략적 목적을 두고 참가국 간 온도 차가 드러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국은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과 AI 등 첨단기술 협력에 합의했지만, 향후 미국이 수출통제 등 중국을 직접 겨냥한 보다 공격적인 정책 동참을 요구할 경우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한국 정부 내부에서는 이러한 점을 우려해 팍스 실리카 참여를 경계하는 기류도 감지된다.

일본은 이날 워싱턴DC의 미국평화연구소에서 열린 행사에서 미국과 양국 협력 의지를 확인하는 공동 문서에 먼저 서명했다. 제이콥 헬버그 국무부 경제 담당 차관과 야마다 시게오 주미 일본대사가 각각 서명했다.

헬버그 차관은 “우리와 신뢰하고 의존할 수 있는 국가들이 AI 기술을 주도해야 한다”며 “그 임무에 있어 일본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랜도 국무부 부장관은 “목표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려 국가나 기업의 부당한 영향력이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공급망과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수출통제와 투자 검증 등 경제안보 정책에 대해 “단순한 관료적 행위가 아니라 미래를 구축하는 기반”이라며 “경제적 강압과 과도한 글로벌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미래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팍스 실리카는 AI 공급망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구상이지만, 미국이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 등 ‘신뢰 가능한 국가들’을 사실상 경제 동맹으로 묶으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에도 국무부는 유사한 취지의 경제번영네트워크(Economic Prosperity Network) 구상을 제시하며 한국의 참여를 추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