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르네상스에서 현대까지, 인물들 통해 살핀 휴머니즘의 의미[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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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다산초당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말이 ‘르네상스’일 것이다. 인간보다는 신을 중시했던 중세 천년 어둠의 역사를 박차고 나와 인간을 다시 중심에 놓은 게 바로 문예부흥의 정신이었다.

영국 태생의 작가 세라 베이크웰이 지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르네상스 이후 휴머니즘 700년사를 꿰뚫은 역작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휴머니스트에 대한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이들을 종횡으로 엮는 글솜씨는 독자들의 탄복을 자아내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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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8년 피렌체를 강타한 흑사병.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내용을 화가이자 판화가 루이지 사바텔리가 묘사한 에칭 작품이다. [사진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이 책은 14세기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부활시킨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으로 유명한 조반니 보카치오의 스토리부터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필사본 발굴에 힘쓰고 인문학적 글쓰기의 원조였던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와 함께 다음 두 세기 동안 이어진 휴머니스트적인 삶의 방식을 창조했다.

오늘날 우리가 이탈리아의 ‘우마니스티’(인문학자)라고 부르는 새 세대의 학자들은 고대의 지혜와 탁월한 능력의 흔적을 발굴해서 연구하고 전파하는 일, 그것을 이용해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 기존의 모델을 바탕으로 비슷한 지혜와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는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지은이 베이크웰은 로렌초 발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셸 에켐 드 몽테뉴, 볼테르, 빌헬름 폰 훔볼트, 찰스 다윈, 버트런드 러셀 등 걸출한 휴머니스트들이 인류사에 끼친 인본주의의 족적도 새로운 시각으로 꼼꼼하게 재조명했다.

휴머니스트들은 사상적 교리에 대한 집착을 거부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휴머니즘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특정한 이론가나 실천가를 추종하지 않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삶의 인간적 측면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휴머니즘은 기본적으로 초자연주의를 거부하며 인간을 자연물로 보는 철학에서 출발한다. 이성과 과학적 탐구를 통해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존엄하고 가치 있다는 생각을 강조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휴머니스트들은 추방당한 학자이거나 방랑객이었다. 가톨릭 이단 심문소의 표적이 된 사람도 있다. 19세기 들어서까지 종교가 없는 휴머니스트들은 비난받거나 배척되거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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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서고에 있는 플라티나와 교황 식스토4세를 그린 그림. 멜로초 다 포를리 작품. 플라티나는 15세기 아카데미아의 회원으로, 교황 바로오2세 시절에 거침없는 발언을 한 죄로 교황청 감옥에서 징역을 살기도 했다. [사진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현대에도 많은 휴머니스트는 여전히 시련을 겪고 있다. 파시즘, 공산주의, 신정일치 독재 정권은 개인의 일상적 자유와 가치를 빼앗은 대가로 좀 더 높은 단계, 혹은 진정한 자유로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이 증명됐다. 지도자나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양심, 자유, 이성 위에 군림한다면 안티휴머니즘이 득세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트럼프나 시진핑 같은 절대 권력자들이 포퓰리즘에 기반한 국가주의를 밀어붙이고 있는 지금 세계는 다시 휴머니즘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요즘엔 인간 삶의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포스트휴머니즘, 반대로 수명을 늘리고 기계와 인간을 합체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도 발호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지은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휴머니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럴 때일수록 휴머니스트들은 자유사상, 탐구, 희망이라는 등불을 들고 자기 삶을 책임질 의무가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일깨우고 지상의 난관과 공동의 안녕에 관심을 돌릴 것을 촉구한다. 역사 속 과거의 휴머니스트들이 흑사병 같은 질병이나 무질서, 고통, 상실의 현장에서 더 먼 과거의 조각들을 발굴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새로운 시작을 꾀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유일한 선은 행복, 행복할 때는 지금, 행복할 곳은 여기, 행복해지는 방법은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던 19세기 미국의 휴머니스트 로버트 G 잉거솔의 강령을 실제로 실천하기란 결코 간단치 않다.

지금 한국 사회는 휴머니즘이 살 만한 곳이 됐는가. 민주주의가 튼튼해지고 인권 의식이 강해졌으며 자유가 만개했지만 여전히 불평등과 차별이 심한 편이다. 이 책은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울로 안성맞춤이다. 휴머니즘이 부흥해 모두가 인간답게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들이 이 책에는 많이 수록돼 있다. 원제 Humanly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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