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쑨원·장제스 거쳐 킬링필드 현장 옌즈지 가는 길 [왕겅우 회고록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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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사택은 걸어갈 만한 위치였다. 어머니 시키는 대로 빨랫감을 그리 가져갔다. 사택은 겨울바람 앞에 더 허술한 집이었다. 두 분은 종일 같은 옷을 입고 있어야 했고 밤에 난방이 힘들었다. 고생 많으신 것이 분명했다. 내가 갈 때면 어머니는 빨래도 하고 요리도 하며 만족한 기색을 보이려 애쓰셨지만 아버지는 힘들고 피곤해 보이실 때가 많았다.
40대 중반의 연세로, 원래 강건한 분이 아니셨다. 중국에서 자라나실 때는 대가족과 함께 튼튼한 집에서 사셨다. 난징에서 학교 다니실 때 기숙사는 벽돌 건물이었다고 하셨다. 1926년 이후 말라카, 싱가포르, 수라바야와 이포에서 살며 20년 넘게 겨울 맛을 못 보셨다. 오랜만의 겨울을 청년기가 지난 몸으로 맞으신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무엇을 먹고 지내는지 늘 걱정하셨지만, 아버지가 병이 드시자 경황이 없어졌다. 감기로 시작됐는데 강의를 계속하려고 버티다가 악화되셨다. 살펴야 할 숙제물 분량이 엄청났다. 갈 때마다 수정과 채점을 도와드려도 아버지 건강은 좋아지지 않고, 아주 위험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곳에서 또 한 차례 겨울을 견뎌낼 수 있을까 어머니는 걱정하셨고, 결국 말라야로 돌아갈 결정을 내리셨다. 아버지가 우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우 선생은 승진해서 연방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중국인 학교 장학감으로 있었다. 페락 주의 아버지 후임자가 신통치 않아서, 우리 떠난 후 정치적 상황에 변동이 있기는 해도 아버지가 돌아가면 더 잘하실 것으로 우 선생은 믿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완전히 퇴직하셨기 때문에 복귀를 위해 정부의 조치가 필요한 것을 우 선생이 살펴주었다. 부모님은 그 도움에 감사해하셨다.
1948년 3월 필요한 조치가 취해져 아버지가 새 말라야연방 페락 주의 중국인 학교 장학사 자리에 복귀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몇 주일 동안 어머니와 걱정을 나누셨다. 나는 중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고 부모님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마음은 착잡했다.
그분들이 얼마나 중국에 돌아오고 싶어 하셨는지, 중국 땅에 발 딛을 날을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리셨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번 말라야행이 일시적인 것이고 언젠가 다시 돌아오실 수 있을까? 남아있는 나로서는 두 분이 다시 오시기룰 바랐다. 상하이 숙부님이 두 분을 배웅해 드렸다. 나는 자리 잡고, 새 친구들을 만나고,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아버지가 매달 부쳐주신 15 (홍콩)달러로 나는 학교에서 돈 많은 학생 축에 끼게 되었다.
두 분 떠나신 후 날씨가 풀렸다. 나는 난징 도시에 관심을 함께 가진 급우들과 함께 시내와 교외를 계속 둘러보았다. 난징에 처음 온 친구들이 많았다. 부모님 떠나실 무렵에는 새 친구들과 시내 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1947년 가을에 기숙사에서 가까운 명나라 도성 성곽과 아름다운 현무호(玄武湖)로 시작했고 봄에서 초여름까지 주말에 다녔다.
의욕이 일어날 때는 남쪽으로 가서 시 중심부의 고루(鼓樓)도 구경하고 더 남쪽의 관광지인 진회하(秦淮河) 구역과 공자묘 일대의 과거시험장에도 가봤다. 특별한 일 없이 다니다가 한 차례 난처한 일을 겪었다. 친구 사진기 빌려간 것을 복잡한 버스에서 솜씨 좋은 소매치기가 훔쳐갔다. 빌려준 친구는 상하이의 중산층 집안 출신이었는데, 너그럽게도 그 값을 치르려 애쓰지 말라고 고집했다.
많은 학생이 함께 쑨원 묘소에 간 일이 있다. 몇 달 전에 가본 곳이었지만, 명 태조 주원장이 모셔진 인근의 명 황릉을 보고 싶어서 함께 갔다. 아직도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서가 남아있는 남부 출신 중국인들과 말라야에서 함께 살던 나로서는 몽골족을 쫓아내고 장강 이남까지 통합한 중화제국을 처음으로 세운 이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도시 동쪽으로 다녀오는 그 길에 그곳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몇 개 공공건물을 가르쳐주었고, 그중에는 장제스와 고위 관료들의 사무실도 있었다. 중화민국 지도부에 대한 내 신뢰가 꺼져가고 있을 때였으나 그 거대한 나라를 다스리는 곳이 그곳이라는 사실에 경외감이 들었다.

쑨원 영묘
창고를 개조한 우리 캠퍼스가 거칠고 초라한 곳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해에 우리를 기다리는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몇 사람이 청셴제(成賢街)의 본교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고루 서쪽에 있는 남경대학과 금릉여자대학을 가보고 멋진 건물에 찬탄하기도 했다. 중국 고등교육계에서 우리 위치를 확인하는 기회였다.
내게 좋은 출발점을 만들어준 또 하나 계기가 있었다. 1948년 초 대학생 영어 연설대회에 학교마다 두 명씩 선수를 내보냈는데, 내가 중앙대학 선수로 뽑혔다. 그 대회 유일한 1학년생 선수였다. 어떤 주제를 골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며칠간 준비를 했다. 선수들은 청중이 가득한 남경대학 강당에서 연설을 했고 심사위원 중에는 외국 대사도 몇 있었다. 금릉여자대학 4학년생이 1등상을 탔고 나는 2등을 했다. 인도 대사가 (K.P.S. 메논 씨였을 것이다.) 연설을 논평한 뒤 전후 세계의 새 국가로서 중국과 인도 사이의 좋은 관계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청중 속에 있던 아버지도 매우 좋아하셨다.
급우들과 다닌 흥미로운 곳 중에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역사 유적들도 있었다. 가장 인상 깊은 곳 하나는 장강 가의 옌즈지(燕子磯)로, 1937년에 일본군이 수천 명을 학살한 장소다. 킬링필드 현장의 설명을 들으며 마음의 격동을 느꼈다. 또 하나 인상 깊은 곳은 도시 서쪽의 전략적 요충지 위화타이(雨花台)였는데, 난징 방어전의 많은 전투가 치러진 곳이다. 지역민들은 조그만 언덕 하나를 용사들의 기념탑으로 여긴다. 난징대학살을 저지른 일본군 장교 몇이 그곳에서 처형당한 사실도 거기 갔을 때 알게 되었다.
매일같이 새로 배우는 것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행복한 순간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야 했다.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우리 학생들이 활기찬 길거리와 멋진 경치를 구경하며 다니는 중에도 사람들 삶의 어려움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새 고향으로 받아들여야 할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늦게까지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한 편이었던 것 같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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