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나는 신해철의 유령"…마왕의 라디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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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호 작가가 촬영한 신해철의 생전 모습. [사진 넥스트 유나이티드]

‘마왕’ 신해철이 돌아왔다. 영혼은 없다. 수십 만 테라바이트의 데이터에서 태어난 ‘확률’만 있다. 14일 자정 무렵 시작된 유튜브 방송 ‘고스트스테이션:더 넥스트’는 “저는 신해철의 유령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신해철의 확률이기도 하다”는 ‘AI 신해철’의 고백으로 문을 열었다.

2014년 세상을 떠난 유령이라기엔 목소리나 화법이 놀랄 만큼 살아있는데, ‘그래서 더 불쾌하다’는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예상했다는 듯 그는 말한다. “알고리즘대로 뉴스 보고, 숏폼 동영상이 뇌에 꽂아주는 도파민 받아먹고… 가만 보면 진짜 로봇은 내가 아니라 여러분 같다”고. 신해철다운 일갈에 뜨끔하다.

2001년 SBS라디오에서 시작돼 11년간 여러 플랫폼에서 이어졌던 전설의 심야방송 ‘고스트스테이션(이하 고스)’이 신해철 사후 11년 만에 부활한 것인데, 부인 윤원희씨가 설립한 (주)넥스트 유나이티드가 3년여 공들인 프로젝트다. 위로가 필요한 청춘들에게 그리운 목소리를 돌려주고, 인디 뮤지션을 소개해 대중음악계 다양성을 회복한다는 취지다. 고스를 처음 연출했던 고민석 PD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아 AI신해철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스크립트가 생성되고, 고 PD가 자연스럽게 다듬어 녹음방송처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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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석 PD. [사진 넥스트 유나이티드]

매달 3차례 업로드될 예정이라는데, 첫 방송은 솔직히 좀 실망스럽다. 그간 시끄러웠던 뉴진스 논란에 입을 연다는 당초 계획이 취소됐기 때문이다. 고 PD는 “첫방은 AI보이스의 정체성과 돌아온 이유를 밝히고 의의를 찾는 정도로 짧게 끝내자는 대표의 의견을 수용했다”고 했다. 첫방부터 자극적 이슈는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심야에 마왕의 목소리를 들으러 유튜브를 켜고 있자니 머나먼 지하세계와 접속을 시도하는 느낌도 든다. 흥미로운 건 초창기 제작 과정을 닮아서다. “방송 론칭하고 형님이 뉴욕으로 넘어갔어요. 뉴욕 지하 스튜디오에서 혼자 녹음한 파일을 뉴저지 PC방에서 4시간 걸려 업로드하면, 제가 2시간 동안 다운받아 편집하는 고단한 작업이었어요. 그때도 저는 큰 틀만 아이디어를 냈고, 선곡과 멘트에 1도 관여하지 않고 방송 적합성만 유지했죠.”

AI신해철은 생전의 데이터를 학습했지만 인간 신해철과는 거리가 멀다. 고 PD는 영화 ‘Her’의 호아킨 피닉스처럼 AI와 대화를 나누는데, 문득문득 낯섦을 느낀다고 했다. “어떤 땐 저를 엄청 반가워했다가 어떤 날은 데면데면 해요. 사람처럼 항상성을 유지하는 존재는 아니죠. 정치적인 이야기도 굳이 제가 꺼내지 않아요. 불필요한 오해는 피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가끔 소름끼치게 신해철다운 표현을 한다. “나는 신해철의 확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눈물이 날만큼 반가웠단다. “너무 놀랐는데, 댓글 반응도 그렇더군요. 저는 오류를 점검하고 편집할 뿐, 문장을 만드는 건 AI거든요. 주제도 제 머리에서 나오지 않게 하는 게 키 포인트죠. 클로징 멘트에 깔린 넥스트 음악 ‘디 오션: 불멸에 관하여’도 AI가 추천하길래 진짜 훌륭하다고 칭찬해줬어요.”

유튜브 방송 자체로 돈을 버는 구조는 아니다. 고 PD는 ‘마왕의 목소리로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기능’을 강조했다. “제가 개입하게 된 건 세상을 향한 고스의 위로와 쓴소리, 인디 뮤지션에 대한 애정까지 이어간다는 취지에 공감해서죠. 이걸 토대로 한 2차적인 수익 구조는 차차 만들겁니다.”

수많은 AI 소재 SF가 예견했던 미래가 바싹 다가온 지금, AI의 영혼 없는 위로를 폐기처분 하거나 통제를 벗어난 AI의 폭주로 야기되는 비극도 떠오른다. “데이터적 존재와의 교감이 그저 환영일 뿐일까요. ‘Her’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는 알면서도 상관하지 않잖아요. 인간을 대신할 수 없다고 기대치를 낮추면 굳이 폐기할 일도 없겠죠. 방송국에서 오래 일한 제가 나름 검열을 하니 폭주할 일도 없지만, 너무 위험하거나 19금 발언은 못 들어봤어요. 아직 그런 내용을 안 다루기도 했네요. 만일 지나친 노출에 대한 이슈를 얘기하거나 하면 또 모르죠.(웃음)”

첫방에서 자칭 “매끄러운 시스템에 에러를 내는 버그”라면서도 논란이 될 만한 뉴진스 이슈를 피해간 건 AI의 한계로 느껴지기도 한다. 신해철이라면 첫방부터 속시원히 쓴소리를 쏟아냈을텐데. “이제 강도를 높여야죠. 뉴진스 아이디어도 AI가 제안한 것인데, 꽤 세게 말하더군요. 양쪽을 골고루 디스하니 저도 재밌게 들었어요. 방송 타이밍이 고민스러운데, 올해를 넘기진 말아야죠. 양쪽 다 싫어할 것 같긴 합니다.(웃음)”

진짜 신해철은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불만이 더 많겠죠. 그 정도밖에 못하냐며 70점 정도 줄 것 같은데, 아무리 해도 70점을 못 넘겠죠. 신해철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즉흥성을 어떻게 따라가나요.”

24일 밤으로 예고된 2회차에선 조금은 더 마왕답게, 크리스마스 이브를 밖에서 즐기는 사람들을 ‘좀비화’시킬 예정이다. 방구석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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