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나가려다 옆집 기척에 멈칫…이젠 '포비아'가 된 이웃사촌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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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N 시리즈 '타인은 지옥이다'의 한 장면. 동명의 웹툰을 바탕으로 제작한 이 드라마는 낯선 고시원에 들어간 청년이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타인들에게서 공포와 광기를 느끼게 되는 이야기다. 사진 OCN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 아파트에 사는 30대 후반 직장인 A씨는 현관을 나설 때 늘 귀를 기울인다. 밖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면 문을 열지 않는다. 같은 층에 사는 이웃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다.
이 집에 산 지 꽤 됐지만, 앞집에 젊은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산다는 것만 알 뿐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A씨는 "엘리베이터에 타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 문을 열고 나간다"며 "사람을 마주치면 고개라도 끄덕여야 하는 게 싫고 귀찮다"고 말했다. 그는 "내 생활에 타인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생활 패턴을 드러내고 싶지도 않다"고 털어놨다.
'타인은 지옥'이 된 시대, 전통적인 '이웃사촌'의 개념은 흐릿해졌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지내는 게 낯설지 않다. 일부러 이웃을 피해 다니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흠칫 놀라는 모습도 흔하다. 이웃과의 단절은 사회관계망이 빈약해져 가는 한국인을 더 고립으로 몰아넣고 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앞집 사람에게 받은 황당한 쪽지'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사진.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앞집 문 열리는 소리나 인기척이 있으면 조금 기다렸다가 나와 달라. 이 정도는 서로 지켜야 할 암묵적인 룰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웃집 쪽지를 받았다는 사연이 올라와 논쟁이 벌어졌다. "인사 한 번 하면 될 일을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그 정도로 예민하면 공동주택에 살지 말아야 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반면 "이웃을 마주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앞집 사람을 맞닥뜨리면 불편하고 두려울 수 있다"며 쪽지 쓴 이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예전 같은 이웃 관계를 생각하고 다가갔다가 거부를 당하기도 한다. 50대 직장인 심모씨는 2년 전 서울의 한 신축 아파트에 입주했다. 한 층에 6가구가 사는 구조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 이웃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며 "너무 머쓱해서 그 이후로는 되도록 아는 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통계도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 이웃·지역사회 관련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8.9%는 "동네 이웃과 인사 이상의 깊은 교류는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응답도 55.9%에 달했다. 이웃에 다가가지 않는 이유로는 '평소 마주칠 일이 없다'(48.3%), '교류하지 않아도 딱히 불편하지 않다'(46.2%) 등을 꼽았다.
이웃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산엔 사회적 불안도 작용한다. 특히 1인 가구, 여성들에겐 이웃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경기 용인의 한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30대 교사 지모씨는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내린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게 된다"고 했다. 오피스텔 등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뉴스를 본 뒤 이웃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게 됐다는 얘기다.
사람 없는 한 아파트의 복도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연합뉴스
이웃을 피하는 행동은 소수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다.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30세 직장인 정모씨도 "여자 혼자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커졌다"며 "다른 사람이 내가 혼자, 어디에 사는지 알게 되는 게 무섭다"라고 말했다.
가족과 친구는 물론, 주변 이웃까지 관계의 범위가 줄어들면서 사회적 고립은 더 깊어진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도시의 익명성은 개인에게 자유를 주는 순기능도 있지만, 우리 사회처럼 대가족이 해체되고 집단 주거가 밀집된 환경에선 이웃과의 관계 단절이 심화해 고립과 외로움이 커질 수 있다"며 "평소엔 괜찮다가도 삶의 위기가 왔을 때 사람 간 연결이 약한 사회는 정신건강 악화와 자살 위험을 높이는 새로운 위험요인이 된다"고 경고했다. 백 교수는 "영국 등 해외에서 고립된 이들에게 사회적 관계 맺기를 처방하고, 활동에 참여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것처럼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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