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가족과 집에서도 카톡으로 대화한다, 사람을 끊는 사람들 [관계빈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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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청년미래센터에서 한 30대 여성이 홀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수현 기자
30대 후반의 김씨는 유명 다국적기업의 3년 차 직장인이다. 정시에 출·퇴근하고,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업무도 무난하게 처리한다. 여기까지는 여느 회사원과 다름없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차이가 있다. 오후 5시 30분 퇴근하면 집으로 직행한다. '회사-집' 동선을 벗어나는 적이 없다. 주말엔 집에서 스마트폰·게임에 매달린다. 끼니는 배달 음식으로 때운다. 카카오톡 친구는 58명. 대부분 회사 동료인데 업무 외 대화는 없다. 친구는 0명. 전화 통화는 거의 없고, 간간이 광고 문자만 들어온다.
8년 넘게 공무원 시험, 취직 준비에 매달리는 동안 친구가 다 떨어졌다. 가족 내 불행한 일을 겪은 후 부모와 연락하지 않는다. 늦깎이로 입사하니 또래가 과장·차장이었고, 입사 동료는 나이 차가 심했다. 회사에서 겉돌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하는 게 오히려 불편하다"며 "고립된 것 같다. 말하기 좀 그렇지만, 외롭다"고 토로했다.
40대 중반의 이모씨는 자녀 셋을 둔 주부다. 살림살이가 안정적이다. 남들 보기엔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얼마 전부터 우울증약을 복용한다. 그녀는 어릴 때 가정 폭력에 시달렸는데, 그 불안이 성인이 돼서도 가시지 않는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뒀다. 자신감 부족 탓인지 주변 사람을 멀리했다. 남편도 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주변과 관계가 얕은, 고립 상태에 가까워진 사람이 늘고 있다. 온라인 초연결시대에 '관계빈곤'이 심화하는 모순된 현상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시절 사회적 거리 두기가 '주변 거리 두기'로 굳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서울 청량리동의 다세대주택에서 한 독거노인이 집안에 혼자 앉아 있다. 김종호 기자
국가데이터처의 사회조사(2025년)에 따르면 '낙담하거나 우울할 때 얘기할 상대가 없다'는 응답자가 21.2%에 이른다. 2015년 17.6%에서 10년 새 3.6%포인트 올랐다. 1인 가구(26.5%)가 가장 높지만, 3인 가구(19.2%)도 낮지 않다. '아플 때 집안일을 부탁할 사람이 없다'는 이도 24.9%에 달한다.
한국의 상대 빈곤율(중위소득 50% 이하 가구 비율)은 2011년 18.5%에서 지난해 15.3%로 떨어졌다. 경제적 빈곤은 줄었지만 관계빈곤은 확대된다는 뜻이다. 국제적으로 심한 편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친구나 가족이 없다'는 비율(20%)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주경희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초연결사회를 들여다보면 '사람'이 빠져 있다. 온라인으로는 24시간 연결돼 방안에서 택배를 받고 게임을 즐긴다"며 "고립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편리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 본연의 대면 소통과 깊은 관계에서 더 멀어진다"고 진단한다. 주 교수는 "기술 발전으로 연결하기는 매우 쉽지만, 고립되기도 너무 쉽다"고 말한다.
신재민 기자
중앙일보 취재팀은 최근 서울 강남구, 경기도 평촌 신도시 학원가에서 중고생 30여명을 만났다. 평촌의 고교 2학년 남학생(4인 가족) 집은 부모가 먼저 출근한다. 주말에 가족이 점심을 한번 같이 먹고, 주로 카톡 가족 방에서 대화한다. 여동생과는 집에서도 카톡으로 한다.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오면 휴대폰을 보다 잔다. 취재팀이 만난 적지 않은 가정이 비슷했다. 여중 3학년 딸을 둔 학부모는 "아이가 집에 오면 문 닫고 방에 들어가 버린다. 불러도 답이 없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지는 않다. 저녁 먹여서 학원 보내는데, 식탁에서 휴대폰만 볼 때가 많다"고 말했다.
국가데이터처는 올해 처음으로 외로움 실태를 조사했다. 13세 이상 인구의 38.2%가 평소에 외로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1인 가구의 약 절반(48.9%)이, 4인 이상 가구도 34.9%가 외롭다. 소득이 높아도 별 차이 없다. 월 600만원 이상 가구의 33%(100만원 미만 57.6%)가 외롭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3년 11월 "외로움은 하루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같다"고 경고하며 세계 공중보건 문제로 선언했다.
관계빈곤은 외로움·불안·우울·고립으로, 심하면 은둔형 외톨이나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 5월 극단적 선택을 한 전북 익산 모녀도 주민센터 직원이 방문하자 "어떻게 알고 왔느냐"며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서울시복지재단이 지난해 사회적 고립 시민 72명을 조사했더니 69명이 접촉을 거부하거나 복지 서비스를 원하지 않았다.
신재민 기자
부산에 사는 강경중(55)씨는 20년 전 서울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 직장을 구하기도,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다. 약간의 우울증 증세가 왔다. 강씨는 2주마다 교회에, 월 1회 병원에 가는 것 외엔 외부와 접촉하지 않는다. 본인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밀어낸다. 그는 "위급 상황이 생겨도 도움을 청할 데가 없고, 청하고 싶지도 않다. 다른 이와 같이 있는 게 오히려 불편하다"고 말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대책은 느리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과제에는 '외로움 담당 차관' 신설이 들어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제1차관이 겸직할 뿐 대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 16일 복지부 업무보고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서울 시내 한 중학교에서 혼자 하교하는 학생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 연합뉴스
최진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관계빈곤은 산업 고도화를 거친 나라에서 나타나지만, 우리는 경제발전이나 민주화, 인구 구조 변화가 유달리 빨랐다. 이 과정에서 지역 공동체가 무너졌고, 사회의 포용성이 떨어지면서 관계빈곤이 심화했다"고 지적한다.
지난 9월 중앙일보 창간 60주년 설문조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로 포용을 꼽은 사람은 10%에 불과했다. 공정·자유 등을 중시했고, 포용은 여섯 번째로 제시했다. 최 교수는 "공원을 많이 만들어 집에서 나오게 하고, 지역 도서관을 활성화해 공예·도자기 같은 교양 강좌를 많이 열며, 집으로 찾아가는 서비스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독사 이전 단계의 외로움이나 고립에 초점을 두고 예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와 민간이 같이 나서야 하고, 마음 투자 사업(지역사회 심리 상담)의 문턱을 낮춰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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