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유령처럼 잊혀진 존재, '양공주'의 목소리를 찾아서[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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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연구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동녘
한국계 미국인 사회학자인 그레이스 M 조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 머무른 미국 상선의 선원이었다. 한때 주한미군 기지촌에서 일했던 조의 어머니는 그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조는 미국에서 자랐다. 그가 열다섯 살 되던 무렵, 어머니의 조현병이 발병했으며, 스물세 살 때는 한국계 미국인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연구모임에서 기지촌 여성을 일컫는 ‘양공주’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조는 가족 내에서 유령처럼 떠돌았던 어머니와 관련된 진상을 찾아내는 데 진력하게 된다.
하버드대에서 교육학 석사, 뉴욕시립대에서 사회학·여성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는 현재 뉴욕시립대 스태튼아일랜드칼리지 사회학·인류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가 지은 『유령 연구』는 어머니의 험난했던 인생 여정을 더듬어 보면서 어머니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전쟁·역사·국제관계·젠더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엮어 낸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지은이는 실증주의적 연구를 중시하는 사회학자였지만 방법론적 한계에 부닥친다. 위안부처럼 오랫동안 비밀에 부치고 싶었던 양공주에 관해 솔직히 털어놓는 증언을 얻어 내기가 어려웠고 한국과 미국 양국 모두 쉬쉬하는 문제라 공적 담론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유령 연구’였다. 지은이 자신을 포함해 산 자들 주위를 배회하는 유령들의 트라우마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 책에는 팩트들과 함께 픽션의 요소를 결합한 실험적 글쓰기가 많이 들어 있다.
‘서양 공주’를 뜻하는 양공주는 미국인, 특히 미군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한국 여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1950년대 초에서 90년대 사이에 한국에서 미군을 상대로 매춘 일을 한 여성은 100만 명, 미군과 결혼한 여성은 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양공주가 어떤 경로로 처음 출현하게 됐는지는 불확실하고 그 실태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양공주의 탄생은 한국전쟁에서 미군들이 작은 도시와 마을 인근에 기지를 세우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돈이나 물건을 얻기 위해 성을 교환하는 일은 전쟁 중 그리고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점점 흔해졌다.
하지만 그 공개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미군 대상 매춘은 한국인들에게는 가족 안에서 수치스러운 비밀이 되었다. 기지촌 매춘이 1970년대 주한미군의 필요에 맞춰 점점 제도화하고 고도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미군은 한국과 맺고 있는 이런 식의 관계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이처럼 한반도의 트라우마에서 탄생한 양공주는 국가 발전의 삭제된 역군이자 동시에 국가적 상실을 표상하는 집단이기도 했다. 한미 관계의 역사에서 큰 존재감을 가지면서도 비밀에 감춰진 양공주들의 트라우마 잔해를 발굴하고 조각조각 맞추는 지은이의 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이다.
양공주와 일제 위안부는 성격이 조금 다를 수는 있다. 그렇긴 하지만 위안부 생존자들의 폭로로 실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처럼 양공주의 유령성과 비밀성도 어두운 역사를 뒤로하고 실체를 보일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출발점을 알리는 작은 총성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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