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메뉴판의 원조는 혁명기 프랑스? 메뉴판에 담긴 역사와 맛과 멋[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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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미식가의 메뉴판 
나탈리 쿡 지음
정영은 옮김
교보문고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식도락이다. 먹는데 야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처음 가본 곳에서 눈에 선 음식을 맛보는 것은 가슴 뛰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성공적인 경험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메뉴판이다. 외국 여행 중 해독 불가 메뉴판 위 아무거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낭패를 겪은 적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터다. 그래서 메뉴판은, 특히 잘 만든 메뉴판은 손님이 취향에 맞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여야 한다.

이 책은 지구촌 곳곳의 (잘 만든) 메뉴판을 넘겨보며 독자들을 맛있고 멋있는 경험의 세계로 이끈다. 무엇보다 독자들은 현지인들도 갈 수 없는 과거의 레스토랑으로 안내받는다. 그곳에서 음식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 풍습, 시대상까지 느껴볼 수 있으니 이런 호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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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 프랑스 루이 15세의 만찬 메뉴판. 손글씨로 쓰여져 있다. [사진 나탈리 쿡]

메뉴판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흔히 그 기원을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기의 파리로 잡는다. 귀족 저택의 요리사들이 실직한 뒤 레스토랑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음식에 대해 설명하는 메뉴판이 더불어 생겨났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는 유럽 중심의 선입견에 불과하다. 프랑스 혁명보다 700년이나 앞선 1100년경 중국 송나라에 근대적 레스토랑의 조건인 ‘서비스와 선택’이 충족된 식당들이 이미 존재했다. 북송 때의 문인 맹원로가 수도 카이펑의 풍속을 기록한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여러 식당들의 시그니처 메뉴가 소개돼있다. ‘왕씨 주루의 매화 만두, 조씨 노파의 고기 전병, 설씨 가문의 양고기 밥….’

송나라의 메뉴판이 남아있지 않은 게 안타깝지만 서구에서도 메뉴판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와서다. 유럽의 식사 문화가 여러 요리를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던 프랑스식 서빙에서 순차적으로 요리를 내놓는 러시아식 서빙으로 바뀌고 있을 때다. 한꺼번에 차리는 음식은 우리네 ‘한상차림’처럼 따로 메뉴가 필요 없다. 당시에는 멀리 있는 접시를 건네는 관습이 없어 손에 닿는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소금 위/아래 자리(above/below the salt)’라는 용어가 생겨난 이유다. 소금 아래 자리, 즉 소금값만도 못한 말석에서는 상석보다 음식 선택의 폭이 적었음은 물론이다.

러시아에서 요리를 차례로 내놓은 것은 추운 날씨 때문에 한꺼번에 차려놓으면 음식이 금방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메뉴판은 “예고편처럼 손님에게 주방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식욕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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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기념 칼튼 레스토랑 연회 메뉴판. 그런데 6월 24일로 예정된 대관식이 에드워드 7세의 충수염으로 취소되면서 연회도 열리지 못했다. 대관식은 에드워드 7세가 회복된 이후 8월 9일에 열렸다. [사진 나탈리 쿡]

이후 메뉴판은 요리 정보 외에도 손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예술적 향기와 다양한 장치가 가미되기 시작했다. 식재료를 표현하는 그림은 물론 유명 화가들의 삽화가 들어가기도 하고, 기념품이 될 만큼 화려한 장식으로 포장되기도 했으며, 기발한 오브제나 어린 손님들을 위한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자만을 뒤집은 파이’ 같은 수수께끼 형식의 음식 소개로 지적 유희와 함께 요리를 즐기는 메뉴판도 한때 유행했다. 답은 자만의 반대말인 겸손(humble)이 들어간 ‘험블 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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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팬아메리칸 항공의 뉴욕발 부에노스아이레스행 B-377 기종 첫 취항 기내식 메뉴판. [사진 나탈리 쿡]

저자는 이 밖에도 세련된 파인 다이닝에서 체인 레스토랑의 대중적 메뉴까지, 호화여객선의 식사에서 감옥의 식단까지 섭렵하며 인류의 음식 문화가 메뉴판에 어떤 의미로 투영되는지 추적한다. 책에 담긴 다양한 메뉴판 사진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해 눈을 떼기 어렵다.

다만 소개된 메뉴가 대부분 유럽과 북미에 한정된 점이 아쉽기는 하다. 저자가 캐나다의 영문학자인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메뉴판을 소중히 모아온 수집가들이 서구에 많기 때문이다. 뉴욕 공립도서관은 그들로부터 기증받은 메뉴판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메뉴판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도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 우리의 미식 문화 변천사가 녹아있는 메뉴판 문화사를 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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