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총 들어야만 했던 선배들…‘트로피’ 대신 들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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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를 간직한 하츠는 올해 명문 구단 셀틱과 레인저스를 밀어내고 리그 선두를 질주하는 신화를 쓰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전쟁 중에 공놀이나 하고 있느냐.”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연고의 프로축구팀 하트 오브 미들로디언(이하 하츠)은 개막 후 8연승으로 압도적인 선두를 달렸다. 이를 지켜보는 영국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에든버러의 정치인이자 사업가 조지 맥크레이 경은 “내가 직접 부대를 만들 테니 함께 입대하자”고 호소했다. 하츠 선수 16명이 가장 먼저 자원 입대했고, 이에 감명받은 하츠 팬 500여 명이 뒤를 따랐다. 놀랍게도 라이벌 팀인 하이버니언의 선수·팬들까지 합류했다.

이른바 ‘맥크레이 부대’ 혹은 ‘축구선수 부대’는 1년여의 훈련을 거쳐 1916년 참전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처음 대규모 화학무기(독가스)가 사용된, 전쟁사를 통틀어 가장 잔인한 전장 중 하나로 꼽히는 솜(프랑스) 전투에 투입된 맥크레이 부대는 첫날 80%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장교 12명과 573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생존자들도 가스 중독 또는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다시는 축구장에 돌아오지 못했다.

축구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뮌헨 공항 참사가 잘 알려져 있다. 1958년 2월 6일, 유럽컵 8강전을 치르고 돌아오던 맨유 전용기가 뮌헨 공항에서 이륙 중 추락해 20대 초반 황금세대를 포함한 선수 8명 등 23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맥크레이 부대 사건은 이보다 훨씬 더 슬프다. 맨유는 10년 뒤 유럽컵 우승으로 비극을 딛고 일어섰지만, 하츠는 선수층 대부분은 물론 열혈 팬들까지 잃은 뒤 한동안 운영 불능 상태에 빠졌다.

재창단 수준의 힘겨운 재건 과정을 거쳐 1958년과 1960년 두 차례 리그 우승을 달성했을 때 에든버러는 말 그대로 눈물바다였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하츠 팬들에게 리그 우승은 맥크레이 부대가 전하지 못한 승전보의 대용품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긴 암흑기로 들어섰다.

그런 하츠가 ‘세기의 동화’를 써내려 가고 있다. 하츠는 시즌 전반기(19경기) 일정을 마친 29일 현재 스코티시 프리미어십 12승 5무 2패, 승점 41점으로 리그 선두를 질주 중이다.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 글래스고를 기반으로 하는 두 명문 구단 셀틱(승점 38점)과 레인저스(32점)를 2위와 3위로 밀어낸 채로 올 시즌의 반환점을 돌았다.

1984~85시즌 당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에버딘이 리그 챔피언에 오른 이후 지난 시즌까지 프리미어십은 무려 40년간 셀틱과 레인저스의 양강 구도가 이어졌다. 같은 기간 셀틱이 22차례, 레인저스가 18차례 우승했다.

영국 스카이스포츠는 “오랜 기간 도전자 역할에 머물던 하츠가 올 시즌 주인공으로 거듭날 채비를 마쳤다”면서 “지난 40년간 이어진 셀틱과 레인저스의 양강 구도를 하츠가 무너뜨릴 태세다. 1960년 이후 66년 만의 리그 우승까지 19경기가 남았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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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1월 에든버러 이브닝 뉴스에 실린 현충일 추모 예배 장면. [사진 하츠 홈페이지]

연고지 에든버러 시민들에게 하츠의 우승은 스포츠 이슈를 넘어 지역사회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특히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맥크레이 부대의 안타까운 역사와 맞물려 주목받는다. 에든버러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하이마켓 광장에는 하츠 선수들의 희생을 기리는 시계탑 기념비가 세워졌다. 구단은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 행사를 100여 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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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탑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민들. [사진 하츠 홈페이지]

하츠의 질주는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 연고의 부자 명문 구단(셀틱, 레인저스)에 눌려 지내던 고전적 도시 에든버러가 다시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의미도 있다.

전반기를 선두로 마친 하츠가 마지막에 웃으려면 후반기를 잘 버텨야 한다. 올 시즌 하츠 돌풍의 주역으로 첫손에 꼽히는 데릭 매킨스 감독의 리더십과 전술적 역량이 남은 일정에도 빛을 발해야 한다. 경쟁 팀들에 비해 선수층이 얇은 만큼 부상 등 돌발 변수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스카이스포츠는 “오랜 기간 우승과 거리가 멀었던 하츠가 어느 정도의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 주느냐가 관건”이라고 진단했다. 맥크레이 부대가 전하지 못한 승전보를, 110년 후 그들의 후배들이 에든버러로 다시 가져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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