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33년만에 폐관 '굿바이 학전'...김민기 "…

본문

17104105438841.jpg

학전의 마지막 공연인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서 열창하는 배우 황정민. 사진 HK엔터프로

“열정만 가득했던 20대를 이곳에서 보냈다. ‘기본에 충실하라’는 김민기 선생님의 가르침을 얻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 영화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배우라고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초심이다. 학전이 없어진다는 것이 슬프지만 내 안에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14일 서울 종로구 학전블루 소극장을 찾은 배우 황정민은 행복한 미소로 학전에 대한 기억을 쏟아냈다. 쫄딱 망했던 ‘지하철 1호선’ 첫 공연 현장, 티켓부스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 갑작스런 폭우에 관객들과 청소를 했던 황당한 상황들까지 생생하게 소개했다.
‘작은 연못’을 부를 땐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쥐고 정성을 다해 노래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가수 권진원과 듀엣으로 불렀다. 그는 커튼콜까지 자리를 지켰고, 전 출연진과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며 학전에 이별을 고했다.

17104105440304.jpg

눈을 감고 '작은 연못'을 부르는 배우 황정민. 사진 HK엔터프로

‘김민기 트리뷰트’로 꾸며진 ‘학전, 어게인 콘서트’ 마지막 공연 풍경이다. 콘서트를 기획한 가수 박학기는 “이번만큼 보람있고 행복한 공연이 없었다. 유명하신 많은 분들이 불평 불만 없이 당연하다는 듯 함께 해주셨다.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날 공연에선 노찾사, 알리, 정동하가 ‘철망앞에서’, ‘바다’, ‘백구’, ‘상록수’, ‘천리길’, ‘내 나라 내 겨레’ 등 김민기의 명곡들을 재해석했다. ‘공장의 불빛’과 ‘아름다운 사람’을 노래한 권진원은 “김민기 선생님의 노래엔 어떤 고결함과 숭고함이 느껴진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이 쓴 노래엔 사랑이란 가사가 없다. 노랫말엔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라고 말하곤 울컥했다.

17104105441991.jpg

14일 '학전, 어게인 콘서트' 무대에 오른 모든 출연자들이 함께 '아침이슬'을 부르고 있다. 사진 HK엔터프로

17104105443342.jpg

마지막 공연을 보기 위해 학전블루로 입장하는 관객들. 황지영기자

학전은 지속적인 재정난과 김민기 대표(72)의 건강 문제 등의 이유로 창립 33주년 기념일인 15일, 폐관하기로 했다. 행사는 따로 없다. 학전을 통해 성장한 예술인과 그 뜻을 이어받은 후배들이 모인 릴레이 공연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 올라 각자의 추억을 나누는 것으로 대체했다.
공연은 지난달 28일부터 20회로 이어져, 총 3000명 관객이 함께했다. 가수 나윤선·동물원·데이브레이크·루시·박창근·시인과 촌장·유리상자·자전거탄풍경·장필순·크라잉넛·한상원밴드, 배우 방은진·설경구·이정은·장현성·황정민 등이 릴레이로 참여했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올라온 강순남(53)씨는 “운이 좋아 마지막 공연을 예매해 보러 왔다. 공연을 좋아해 지방에 살면서도 시간이 날 때 대학로를 찾곤 했다. 학전도 그 중 하나였다. 좋아했던 공연장이 문을 닫는다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17104105444856.jpg

김광석 노래비 옆에서 포즈를 취한 '포크계 대부' 김민기 대표. 사진 학전

예술인들의 못자리 

17104105446428.jpg

1991년 개관부터 2024년 폐관까지 학전의 역사가 담긴 게시판. 황지영기자

‘아침이슬’, ‘상록수’ 등을 부른 김민기 대표가 만든 학전은 대중문화사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1991년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에서 시작해 33년 간 총 359개의 작품을 기획·제작했다. 배울 학(學), 밭 전(田)으로 이름 지은 건, 예술문화의 터전이 되겠다는 각오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론 1994년 초연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국내 대표 아동극 ‘고추장 떡볶이’ 등이 있다. ‘학전 독수리 5형제’라 불린 김윤석, 설경구,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를 비롯한 유명 배우들이 다수 거쳐 갔다. 조승우는 지난 1월 ‘제8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후 “아무것도 모르는 21살 나이에 학전에서 무대가 주는 아름다움과 모든 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이 상과 모든 영광을 학전과 김민기 선생님께 바친다”고 말했다.

17104105447889.jpg

tvN '유퀴즈'에 나온 학전의 과거 모습. 사진 tvN(학전 제공)

고(故) 김광석을 비롯한 가수들의 전설적인 무대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1980~90년대 한국 대중음악 르네상스 주역들이 모인 동아기획 멤버 박학기·장필순·들국화·시인과 촌장 등은 학전을 주무대로 삼았다. 박학기는 “학전은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한 꿈의 장소”라고 전했다.

여러 기억속의 학전 

동아기획의 막내였던 김현철 또한 지난 10일 릴레이 공연에 참여하고 “한국 대중문화의 산실이었던 학전이 대중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으면 한다”고 바랐다. “이소라 무대를 학전에서 처음 보고 협업을 제안, 영화 ‘그대 안의 블루’ OST를 만들었다”면서 학전이 가교가 되어줬다고 했다.

17104105449274.jpg

왼쪽부터 가수 김현철, 윤종신, 김재환. 사진 각 소속사 제공.

윤종신은 지난 12일 공연을 통해 처음으로 학전 무대를 밟았다. 김민기 대표에 대한 존경과 학전이 가진 의미를 되새기고자 참여했다는 전언이다. 무대에선 관객으로 방문해 김민기 대표와 술자리를 가졌던 일화를 공개했다.

‘2017 김광석 노래 부르기’ 대회 출신인 김재환도 선배 박학기의 부름에 달려와 학전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 했다. 그는 “가수의 꿈을 키우던 시절의 추억을 안겨준 학전이기에 아쉬움과 애틋함이 밀려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음악콘텐츠협회 최광호 사무총장은 지금의 K팝 밑거름엔 학전의 영향이 있다고 봤다. “새로운 음악을 계속해서 접할 기회를 마련하고, 듣는 음악의 가치를 존중해야 음악산업계가 발전할 수 있다. 학전이야말로 신진예술인을 발굴하고, 서로 공감하는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전했던 곳인데 앞으로 이런 공간이 나오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암 투병 중인 김민기 대표는 박학기를 통해 “모두 다 그저 감사하다”는 덤덤한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학전은 다음 달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을 맡는다. ‘공연예술인들의 터전 역할을 해달라’는 김민기 대표의 뜻을 잇되, 학전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독자적 공간으로 7~8월 재개관할 예정이다.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와 어린이극 등 기존 사업은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4,971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