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내게 가르침을 베푼 친구들 [왕겅우 회고록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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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르침을 베푼 친구들 / Learn from Friends

아버지가 난징을 떠나시기 전에 기숙사 친구 중 중국문학을 좋아하는 두 사람 이야기를 해드렸다. 둘 다 중국어문학 전공이었다. 여우서우 교수가 글씨를 칭찬한 첸서즈는 훌륭한 학인 가문 출신이었다. 과거 합격자를 여럿 배출하고 고향 창저우(常州)에서 존경받는 집안이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 이유는 절반 외국인인 나의 배우려는 열성을 인정한 데도 있었을 것 같다. 내게 서예의 역사를 가르쳐주고 여우 교수가 가르쳐주는 고전 시문의 형태와 양식 진화 과정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점잖고 세련되고 좀 건들거리는 편이던 그는 무엇보다 겸손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첸은 내 영어 능력을 칭찬했다. 그도 영시를 스스로 읽을 수 있었으나 편안하지 않았고 번역문을 보았다. 셰익스피어가 많이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과 1930년대에 출판된 량스추(梁實秋)의 번역본 여덟 편을 첸이 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말라야에서 학생 시절 공부했던 “멋대로 하세요”도 그중에 있었다. 그 언어는 내게도 힘들었고,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 왕” 같은 다른 희곡들도 읽기 힘들었다.

첸은 이 작품들을 모두 번역으로 읽었는데, 그 의미를 중국인의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이 신기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이 보편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했지만, 원문을 읽지 않은 중국 독자에게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여기서 ‘보편성’의 의미를 새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 후로 잊어버린 일이 없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에 익숙지 않은 독자에게는 좋은 번역본이 원문보다 더 뛰어난 전달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량스추의 번역이 첸서즈에게는 적합했던 것이다.

고전 시문의 작법을 더 가르쳐달라고 첸에게 부탁했다. 아버지는 나름의 이유 때문에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인데 첸은 해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첸은 내 시작(試作)을 고쳐주면서 음운이 안 맞는 글자들과 함의가 빈약한 어휘들을 지적해주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학교가 닫힐 때까지 몇 주일밖에 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작별할 때 우리 우정을 주제로 첸이 써준 시를 오래도록 간직했지만, 무능한 제자인 나는 시 짓기를 다시 시도하지 못했다.

첸과는 기질이 다른 또 하나 중국어문학과 친구가 있었다. 장슝(章熊)은 우리 학년에서 제일 어린 열여섯 살이었다. 그도 서예를 잘했고 고전 시문에 밝았으나 상하이 출신인 그의 마음은 새 세대 작가들에게 열려 있었다. 쉬즈모(徐志摩)와 궈모뤄의 시, 마오둔(茅盾)과 라오서(老舍)의 소설, 그리고 루쉰(鲁迅)이 이끄는 좌익의 논설문을 내게 가르쳐주는 것이 고마웠다. 젊은 세대를 자극하는 요소들에 내 눈을 열어주었고 내가 익숙지 않던 근대중국어의 특성들을 알려주었다. 외향적인 성격의 장슝은 언제나 명랑했고, 주변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중국의 미래를 무척 낙관적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장슝이 우리 영문학과 학생들과 잘 어울리고 우리 행사에 모두 참여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많은 번역본을 통해 영문학에 익숙했고 그중 낭만주의 작가들을 제일 좋아했는데, 19세기 유럽 문학, 특히 독일 낭만주의 작가들과 프랑스 모더니즘 작가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 했다. 도시의 젊은 중국 지식인들이 유럽 문학의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 어떤 관현악과 실내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연극이 상하이에서 공연되는지,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번역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이 흡수되고 현지화되고 재해석될 수 있는지 그가 보여주었다. 잘못 전달된 것도 있을 수 있다고 그는 인정했지만, 전해진 자극은 틀림없는 것이었고 새로운 생각과 창조력이 그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그의 열정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나도 당시 진행되고 있던 문학과 문화의 변화에서 새로운 측면들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중시하지 않으시던 문학의 새로운 세계를 장슝이 가르쳐주었다. 아버지에게 장슝 이야기를 했더니 말라야에 있을 때 현대소설과 현대시를 읽게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며 친구들 권해주는 대로 많이 읽으라고 하셨다. 식민지 말라야에서 살며 내가 지나친 민족주의에 빠지거나 좌익과 반-전통 경향 작가들에게 심취할 것을 조심하셨던 것 같다.

장슝을 다시 만난 것은 25년 후인 1973년, 문화혁명 중의 인민공화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린뱌오와 “주공(周公, 저우언라이를 비판하는 지칭)”에 대한 비판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난징을 떠난 후 처음 재회한 친구가 장슝이었고, 아주 우연히 주어진 기회였다.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국교를 맺은 직후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의 역사학자와 중국학자로 구성된 사절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갔을 때였다.

북경대학의 초청자들은 내가 난징에서 공부한 일이 있고 그때의 학우들과 연락이 끊긴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게 기억나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데, 나는 대답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밖에 사는 사람과 연루되는 것이 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거듭거듭 묻는데 장슝은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중국 현대문학 학도로서 좌익 사상에 동조하는 편으로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장슝의 소재를 알아냈다는 말을 들었다. 북경대학 부속중학의 교과 담당 교감으로 중국어문학 주임교사를 겸하고 있다고 했다. “만나고 싶습니까?” “그럼요!” 열렬히 대답했다. 그날 오후 숙소의 접견실로 안내받아 갔더니 그가 있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그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기억하던 그대로 활기차고 쾌활한 모습이었다.

장슝은 북대중학에서 자기가 하는 일, 중국어 교육에 관한 특별한 책임, 그리고 자신이 제작에 참여해 전국에서 쓰이게 된 교재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잘 지내는 것이 반가웠고, 다른 친구들 소식을 물었다. 나와 함께 외국어학과에 다니다가 난징 함락 후 베이징에서 공부를 계속한 친구들 이야기를 들었다. 외국어대학 교수가 된 두 사람 외에 대부분은 여러 정부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첸서즈 소식을 물으니 첸은 베이징으로 오지 않았다고 했다. 연락이 한참 끊겼다가 나중에 들으니 고향 창저우로 돌아가 지역 학교에서 교사직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첸의 뛰어난 재능이 공산당 승리 후 활용되지 못해서 지방 학교의 교사직에 묶이게 된 것으로 생각했다.

장슝은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고 나 또한 그랬다. 과거의 추억과 약간의 교육 관계 문제에 화제를 제한하는 편이 좋겠다고 이심전심으로 느꼈다. 만나서 한 시간가량 함께한 것으로 만족했다. 이제 소재를 알았으니 꼭 다시 만날 것을 다짐했다. 덩샤오핑 개혁 시작 후인 1980년 베이징에 다시 갔을 때 그에게 연락했고, 그를 통해 다른 급우 몇도 다시 만났다.

여러 해 후 마거릿과 같이 갔을 때 장슝 부부와 함께 베이징 외곽의 향산(香山)공원에서 하루 소풍을 즐겼다. 1973년에 만나던 상황을 그날 그가 이야기했다. 그날 아침 내가 온 소식을 듣고 노동개조를 받고 있던 시외의 농장을 떠날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허름한 농민복을 입고 있던 것을 알아채지 못했냐 묻기에 으레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우리 만남은 감시하에 있었고, 우리가 헤어진 후 우리 대화 내용의 세밀한 진술서를 보안부서에 내야 했다고 그가 가르쳐주었다.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내게는 뜻밖의 즐거움이었으나 그의 당안(當案)에는 특기사항으로 남아 다행히 덧나는 일은 없었어도 마오쩌둥 시대의 말기가 지나갈 때까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서예 솜씨가 녹슬지 않은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소동파의 작품 하나를 고운 소해체로 써 주었는데, 액자를 해서 아직도 곁에 두고 있다.

1973년 이래 내 중국 방문은 대개 공식적 여행이었다. 학술방문단에 참가하거나 학회 참석, 또는 홍콩대학이나 싱가포르국립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업무 방문이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방문하는 도시에 사는 친척과 친구를 만나려 애썼고, 우리 왕씨의 출신지 정딩과 아버지의 고향 타이저우를 방문할 기회도 있었다. 알던 친척들은 이제 그곳에 사는 사람이 없으니 친척 방문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인 “뿌리 찾기” 시도인 셈이다. 그래서 첸서즈가 자기 고향에 있을지 모른다는 장슝의 말도 떠올리지 않고 지냈다. 2010년에야 창저우 부근을 지날 일이 있어서 알아보았더니 은퇴 후에도 거기 살고 있으며 내 방문 계획을 반가워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할 수 있었다. 나보다 세 살 위로 83세였던 그는 쇠약해 보였다. 그는 베이징으로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학을 아예 그만두었다고 했다. 집안 사정과 관계된 이유가 아니었을까 느낌이 들었으나 그는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그는 지역 사범학교에서밖에 가르칠 수 없었고 결국 전쟝 사범학교로 올라갔다가 후에 창저우 공과대학에 합쳐질 지역 사범학교 부교장으로 은퇴했다.

그는 시작(詩作)을 계속했고, 일군의 지방 학자, 시인, 예술가에 관한 연구를 행했다. (자기 조부님 첸밍산-錢名山과 교류하던 인물들) 1978년 시작된 개혁 시기에 그의 업적이 인정받아 지역의 문화계 지도자가 되었다. 2013년 그의 타계 후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전통적 문학과 예술의 미적 가치에 대한 그의 공헌을 조명하는 추모 문집을 출간했다. 그의 평생 업적이 오늘날 많은 중국인이 오르려고 드는 부와 권력의 거대한 탑에 조그만 그림자 하나밖에 남기지 못한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도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제자들을 일깨워주려는 그의 꾸준한 노력이 조그만 성과라도 거둔 것은 기쁜 일이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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