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통령 4명 뒤엔 그가 있었다…'민주당 킹메이커' 이해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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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25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이 전 총리는 23일(현지시간) 베트남 출장 중 심근경색 증상을 보이며 쓰러져 현지 병원으로 응급 이송돼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25일(현지시간) 오후 2시 48분 현지 병원에서 영면했다.
고인은 삶 자체가 현대사의 압축과도 같았다. 1988년 평화민주당 입당 이후 40여년 동안 고인은 4명의 더불어민주당 출신 대통령과 인간적·정치적 연을 맺었다. 고인과 그들의 관계가 곧 민주당 계열 정당 집권사의 뼈대이자 근육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여권 내 최고의 전략가로도 통했다.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인 이해찬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2022년 국회박물관에서 열린 회고록 ‘꿈이 모여 역사가 되다’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고인는 청양면장 출신인 부친 이인용씨 아래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딱히 부모님을 졸라야 할 일도, 형제자매들과 경쟁할 일도 없었다. 특히 먹을거리는 언제나 풍성했다”고 그는 유년기를 회고했다. 이후 서울로 유학해 덕수중·용산고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는 자퇴한 뒤 이듬해 서울대 사회학과 72학번으로 다시 입학했다.
대학 진학 이후엔 투쟁적 삶의 연속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2년 만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형집행정지로 1년 만에 출소했다. 이후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1978년 고시촌으로 불리는 서울 신림동에 광장서적을 열었다. 다음해인 1979년엔 출판사 돌베개를 창업했다. 그해 ‘12·12 군사반란’이 터졌다.
김대중과 이해찬

1996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당직 개편 인선을 단행한 직후의 모습. 왼쪽부터 정동영 대변인, 박상천 총무, 김대중 총재, 한광옥 사무총장, 이해찬 정책위의장. [중앙포토]
1980년 복학해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던 고인은 그해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처음 대화를 나눴다. “DJ는 ‘(신군부가) 5·16 세력보다 더 흉악하다. 신중해야 한다’면서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싸울 의지가 없다고 느꼈다. 믿을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랬던 고인은 그해 6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엮여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그제서야 고인은 “유언 같은 법정 최후진술을 듣고 DJ에게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고초를 겪은 그는 처음 대학에 입학한 지 14년 만인 1985년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그는 본격적인 정치의 길을 걸었다. DJ는 1988년 13대 총선 때 고인을 정계에 입문시켰다. 서울 관악을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나와 김종인(민주정의당)·김수한(통일민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등원 직후부터 5공 청문회에서 송곳 질의를 하며 당시 통일민주당 노무현 의원과 함께 유명세를 탔다.

고인이 1990년 6월 당시 지낸 평화민주당 의원 시절 국회 본회의에서 대정부 질의를 펼치는 모습. 연합뉴스
1997년 15대 대선에서 고인은 대선 판세를 분석하는 기획 실무를 맡았다. 인구 구조, 투표율, 세대별 성향 등을 분석해 판을 짜는 능력을 DJ가 눈여겨 본 것이다.
선거에서 이겨 DJ가 집권한 뒤엔 만 45세에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이해찬 세대’라는 말이 이 때 나왔다. 고인은 대입 무시험 전형, 전교조 합법화, 교원 정년 단축과 성과급 제도, 학교 폭력 근절 등을 추진했는데 이 중 대입 개편안 후폭풍으로 교육 현장의 혼란이 컸다. “단군 이래 최저 학력”과 같은 비판이 이어졌지만 고인은 “학력 저하는 없었다”고 맞섰다.
노무현과 이해찬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2004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 참석을 위해 회의실로 입장하는 모습 [중앙포토]
고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한 시절이다. 1988년 13대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함께 활약했던 노 전 대통령은 14대 총선을 앞두고 고인이 공천 탈락 위기에 몰리자 “이해찬 같은 사람이 공천 안 되면 나도 탈당하겠다”고 시위할 만큼 고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고인이 묵묵히 곁을 지켰다.
노무현 정부 시절 고인은 ‘실세 총리’를 넘어선 ‘책임 총리’였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온전한 공인(公人)이어야 한다. 공인의 자세는 남한테도 엄하고 나한테도 엄해야 한다. 그래야 공적인 기강이 선다”는 회고처럼 비타협적이란 비판도 종종 받았다. 총리 취임 후 대정부질문에서 야당을 향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는 퇴보한다. 차떼기당 맞지 않느냐”고 소리치는 등 거침없는 발언으로 ‘버럭 해찬’라는 별명도 얻었다. 고인은 “의도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가 ‘관습 헌법’이란 논리로 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을 내리자 노 전 대통령이 “처음 들어보는 이론”이라고 불만을 표했다는 보도가 일부 언론에 실리자 일부러 강하게 발언해 시선을 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문재인과 이해찬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8년에는 전당대회에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정치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당 대표 2년 임기 동안에 당을 제대로 된 진지(陳地)로 만들어 놓는 게 중요하겠다 싶었다”고 그는 출마 배경을 술회했다. ‘20년 집권 플랜’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고인은 그해 8월 민주당 대표가 됐다.
김영옥 기자
‘시스템 공천’을 앞세운 고인의 지휘 아래 민주당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지역구 163석 등 총 180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뒀다. “첫 목표는 130석으로 잡았지만, 2월 첫 조사에서 150석에 육박할 것 같았다. 단독으로 150석을 넘길 수 있겠다 싶어 목표를 상향했다”고 고인은 기억했다.
하지만 정작 대표 퇴임 기자회견에서 고인은 “현대화된 플랫폼 정당을 만든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고 술회했다. 전 당원의 온라인 투표가 가능한 시스템을 만든 게 최고의 보람이었다는 것이다. 고인의 공약인 ▶당 지도부 선출시 권리당원 의사 반영 ▶중요 정책·현안에 대한 전 당원 투표제 도입 등은 2020년대 이후 민주당의 주요 의사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인이 뿌린 정치적 씨앗이 민주당에 깊숙히 뿌리내린 것이다.
이재명과 이해찬

이재명 대통령(당시 대선 후보)이 지난해 5월 대선을 사흘 앞두고 세종 유세에 앞서 이해찬 민주당 상임고문과 인사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재명 정부의 탄생은 고인의 마지막 프로젝트였다. 당내 비주류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성남시장 시절부터 고인을 정치 멘토로 여겼다. 이 대통령이 자신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던 이화영 전 의원을 경기지사 취임 직후 초대 평화부지사로 들인 것도 고인과의 관계를 의식한 조치였다고 한다.
그런 고인은 위기 때마다 이 대통령을 향해 당 내부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주는 보호막 역할을 했다. 2018년 친문(친문재인)계가 이른바 ‘혜경궁 김씨’ 사건 논란으로 이 대통령을 향해 탈당 압박을 하자 당시 대표에 출마한 고인은 “당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엄호했다. 대표 취임 후엔 친문 지지자가 이 대통령의 출당을 요구하는 천막 집회까지 열었지만 “본인이 부인하고 있고 재판이 진행 중이니 지켜봐야 한다. 정무적 판단 단계가 아니다”는 말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치열했던 20대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선 고인의 정치적 자산이 이 대통령의 물적 토대가 됐다. 고인은 “누구를 꼭 편드는 건 아니다”고 했지만, 고인의 싱크탱크이자 거대 외곽 조직이던 ‘광장’이 2021년 5월 이름을 ‘민주평화광장’으로 바꿔 이 대통령 지지 조직으로 개편한 게 ‘이재명 대세론’의 신호탄이 됐다. 민주평화광장 대표는 고인의 측근으로 분류되던 조정식(현 이재명 대통령 정무특보) 의원이 맡았고 ‘친이해찬계’ 이해식·이형석 의원 등 10명 이상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민주당의 친명계 인사는 “이 대통령이 ‘변방의 장수’에서 ‘당의 주류’로 거듭난 때가 이 순간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고인은 왜 당내에서도 핍박받던 ‘비주류’ 이 대통령을 선택했을까. 고인은 2022년 대선 패배 이후 펴낸 대담 형태 회고록에서 “정치권에서 이 후보(이 대통령)처럼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소년공 출신의 인생 역경에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권 관계자는 “고인은 평소 권력 의지를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고 전했다.
변화를 추구한 ‘킹메이커’

의원 시절의 이해찬 부의장과 김대중 당시 총재. 중앙포토
민주당이 배출한 대통령 4명과 긴밀하게 호흡해 온 고인이 민주 진영의 독보적 ‘킹메이커’였다는 데는 정치권의 이론이 없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돌이켜보면 고인은 매 선거 때마다 가장 많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옆에 섰다”고 했다. 1997년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 2002년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 2017년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대선 승리를 이끌었다. 이 대통령이 승리한 지난해 6·3 대선 때도 민주당은 고인에게 역할을 요청했지만, 고인은 건강 이유로 고사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골초’로 불릴 만큼 애연가였던 고인은 말년에는 건강 문제로 고생했다.
가까운 정치인으로는 고인의 보좌관을 지낸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정태호 민주당 의원, 같은 당 김현·이해식·최민희 의원 등이 꼽힌다. 2018년 고인의 대표 경선을 도운 정청래 대표 역시 거리가 가깝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돌이켜보면 고인은 매 선거 때마다 가장 많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옆에 섰다”고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옥씨, 딸 현주씨가 있다. 고인의 시신은 베트남에서 비행기를 통해 운구될 예정이며, 26일 밤 출발해 27일 새벽 인천공항 도착 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르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국가장을 위해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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