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서태지의 패션 보드, 30년 뒤엔 ‘메달 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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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상 종목 중심의 한국 동계올림픽 메달 지형도가 바뀐다. 이번 올림픽의 첫 메달 2개가 설상 종목 스노보드에서 나왔다. 스노보드 평행대회전 김상겸. [뉴스1]

직장인 최인지(가명·47) 씨는 10일 휴대폰 알림 소리에 잠을 깼다. 대학시절 스노보드 동호회 회원이 보낸 카톡 메시지가 폰을 가득 채웠다. 최씨는 “동아리가 갑자기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밀라노 올림픽 스노보드에서 한국 선수가 이틀 연속 메달을 따는 것을 보고 다들 흥분했더라. 하프파이프 경기에선 최가온이 금메달 후보라니 함께 모여 합동응원이라도 해야겠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겨울 스포츠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얼음을 지치는 날카로운 ‘날(blade)’의 시대에 설원을 누비는 넓적한 ‘판(plate)’의 활약이 더해졌다. 스노보드가 ‘윈터 코리아’의 새로운 전략 무기로 우뚝 선 것이다.

한국의 역대 동계올림픽 메달권은 지독하게 편중되어 있었다. 이번 대회 전까지 수확한 79개의 메달 중 ‘효자 종목’ 쇼트트랙이 53개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여기에 스피드 스케이팅(20개)과 피겨 스케이팅(2개)을 보태면 전체의 95%인 75개가 빙상에서 나왔다. ‘눈과 얼음의 축제’라지만 한국에선 사실상 ‘얼음만의 축제’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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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최가온. [AP=연합뉴스]

하지만 이번 밀라노 대회는 결이 다르다. 김상겸(37)이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에서 은메달을, 유승은(18)이 스노보드 빅에어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설상 종목 사상 최초로 한 대회 다수 메달 수확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여기에 하프파이프의 최가온(18)과 이채운(20)까지 메달 사냥에 나서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X세대 스노보더라는 최인지씨는 “유승은은 알파인이 아니라 헐렁한 옷을 입고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는 프리스타일 스노보드 종목에서 한국 선수가 따낸 첫 올림픽 메달이라서 더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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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이채운. [AFP=연합뉴스]

대한스키협회 박희진 이사는 “알파인 스키는 체격 조건이 월등한 북유럽 선수들에게 유리하지만, 스노보드는 피겨나 체조와 결이 비슷하다”며 “세밀한 감각을 갖춘 아시아인이 충분히 세계 정상을 노릴 수 있는 종목”이라고 분석했다.

한국 스노보드 대중화의 불씨는 1990년대 중반에 지펴졌다. 당시 스노보드를 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프리 스타일' 뮤직비디오는 문화적 기폭제가 됐다. 스키장 광장에는 서태지의 선율이 흘렀고, 슬로프 위로는 '컴백홈' 당시 서태지가 입었던 것처럼 헐렁한 배기 팬츠에 비니를 깊게 눌러쓴 대학생 보더들이 새로운 겨울 문화를 완성해 갔다. 박 이사는 “그때 늘어난 보드 인구가 토대를 만들었다. 1세대 선수들은 아르바이트로 자금을 모아 전지훈련을 떠날 만큼 열악했지만, 김상겸처럼 30대 중반까지 버텨내며 결실을 본 사례가 나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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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4집 수록곡 ‘프리스타일’은 스노보드 대중화의 기폭제였다. [사진 뮤직비디오 캡처]

이러한 열정은 ‘보드 대디’들의 헌신을 통해 2세대로 계승됐다. 유승은은 “1975년생인 아버지가 젊은 시절 해외로 몇 달씩 원정 훈련을 다녔던 스노보드광이었다”며 “원래 탁구를 하던 내게 보드를 권유하고 가르친 것도 아버지”라고 밝혔다. 최가온 역시 7살 때 아버지 최인영 씨의 권유로 보드에 입문했다. 아버지는 딸을 위해 영상 분석부터 회전 훈련까지 직접 챙겼다. 6살 때 아버지가 선물한 장난감 보드로 시작한 이채운도 마찬가지다. 박 이사는 “자신들이 젊은 시절 갈망했던 지원을 자녀에게 아낌없이 쏟아붓는 헌신적인 아버님들이 설상 종목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설명했다.

협회와 기업의 전략적인 지원도 한몫했다. '선택'과 '집중'도 통했다. 아시아 최강국 일본은 사이타마에 대형 훈련시설을 갖추고 선수를 육성한다. 박 이사는 "한국엔 그런 시설이 없다. 유소년 대회를 열어 선수를 발굴하고, 어린 나이부터 체조와 피겨 기술을 접목한 훈련 캠프를 운영했다"고 말했다. 스키협회는 두각을 나타낸 유망주에게 연간 1억원(해외 약 200일 체류비)의 전지훈련비를 지원했다. ‘스키 마니아’ 신동빈 회장이 이끄는 롯데그룹이 2014년부터 300억 원 이상을 후원하고 실업팀을 창단하는 등 든든한 뒷배가 돼주었다.

여기에 Z세대의 도전의식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채웠다. 유승은은 비장의 무기로 실전에서 잘 쓰지 않던 ‘백사이드 트리플콕 1440도’를 결선 1차 시기에서 과감하게 시도해 성공했다. 최가온은 2024년 스위스 락스에서 열린 월드컵에 출전해 허리를 다쳤다. 헬기로 병원에 긴급 이송돼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1년의 공백기를 가진 그는 보란듯이 지난해 1월 같은 곳에 열린 월드컵에서 복귀전을 치러 동메달을 따냈고, 올해는 금메달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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